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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하지) 않(은) 남매

내 계획은 그래

by 그래도 나는 2024. 7.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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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얘들아, 이불 개고 와서 밥 먹어라. 엄마도 할 일이 많아. 너희가 먹어야 엄마도 할 일을 하지."
 
방학이 본격적으로 시작한 첫날 오전 8시경이었다.
남매는 진작에 일어나서 책도 보다가 뒹굴다가 가끔 아무 행동도 하지 않고 마냥 누워만 있었다.
내 말에는 전혀 미동도 하지 않은 채 말이다.
학교도 안 가는데 아침 7시부터 일어나 계시면 어쩌자는 건지, 하나도 아니고 둘씩이나.
학기 중보다 방학 때 더 일찍 기상하면 불법이라는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남매는 새벽같이 일어나셨다.
아이들이 일찍 일어나면 일찍 일어날수록 나는 왜 깊은 한숨이 나오는 걸까.
"일어났으면 이불 개고 밥을 먹든지, 안 먹을 거면 말고. 정확히 말을 해줘야지."
"먹을 거야."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여전히 이불속에서 헤어 나오지 않는 딸과 대답마저도 아끼는 입이 매우 무거우신 아드님.
"혹시 아침밥 안 먹을 거면 전날 미리 말해, 확실하게. 그러면 엄마가 너희 밥까지 안 차려도 되잖아. 먹을지 안 먹을지도 모르면서 엄마가 밥을 차릴 필요는 없겠지? 너희는 어떻게 생각해?"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한창 성장기인 어린이들에게 한 끼라도 더 배불리 먹이려고 은근슬쩍 아침밥을 강요하는 나.
"밥을 먹을 거면 일어나고 안 먹을 거면 이라도 닦아야지. 자고 일어나서 냄새 나."
그런데 또, 남매는 요지부동이었다.
"엄마, 지금 계획표대로 하고 있는 것뿐이야."
딸도 더 이상은 참지 못하겠다는 듯 저렇게 대꾸했다.
"자, 봐봐, 엄마. 지금이 몇 시야? 아직 9시도 안 됐잖아. 지금은 안 일어나도 돼. 아침밥은 오전 9시부터 10시 까지야."
과연 딸이 내게 들이민 방학 생활 계획표에는 아침밥을 먹는 시간이 자그마치 '오전 9시부터 10시까지'였다.
더욱 나를 좌절하게 만들었던 건, 그 한 시간에 단순히 아침식사에만 한정된 것이 아닌 '기상 및 아침 식사'라는  이 문구였다.
비단 아침식사 시간으로만 한정하지 않고 '기상'도 과감히 끌어들였다. 게다가 '및', '및'이라니?
그 부사는 나로 하여금 딸에게 아직 9시도 되지 않았는데 무조건 밥을 먹으라고 강요할 수 없는 마법의 한 글자였다.
딸의 말이 맞다.
반박할 수 없다.
딸 말마따나, 엄연히 따지자면 딸은 단지 자신이 꾸린 계획표대로 실천을 하고 있을 뿐이었다.
"엄마, 9시에서 10시 사이에 '기상 및 아침식사'잖아. 그러니까 아직 난 더 누워있어도 된다고."
그렇긴 하네.
틀린 말은 아니네.
하지만, 가만,
뭔가 석연찮은 구석이 있다.
그렇다면, 딸 말대로라면, 계획표대로 움직이고 있는 거라면 나도 할 말은 있었다.
"그렇단 말이지? 그럼 다시 한번 봐보자. 그렇게 따지자면 넌 지금 아직 눈도 떠서는 아니 되었어! 이제 고작 8시인걸? 어린이가 자고 있을 시간에 눈 멀뚱멀뚱 뜨고 지금 뭐 하는 게지? 계속 자고 있다가 딱 9시가 되면 기상도 하고 아침도 먹어야지. 안 그래. 뭐 하러 벌써부터 일어나서 이러고 있는 거라니? 네 말대로 계획표 시간대로 실천하는 거라면 더 철저히 모든 시간에 그렇게 맞춰 살아야지 안 그래?"
라고는, 그러나 유치하게 따지지 않았다, 물론.
어디 가까운 대나무숲 없나?
사전에 엄마와 원만한 합의가 안된 철저히 어린이 중심적인 계획표, 그건 치명적이었다.
그리고 딸이 세운 계획표의 하루 일과 중에서 유일하게 거의 완벽하리만치 시간을 지키시는 건 단연 '핸드폰과 O튜브 보는 시간'이었다.
그것도 알람까지 맞춰 놓고서 말이다.
'하루에 한 시간' 정도 남매에게는 황금 같은 시간이다.
나의 입회 하에 (내가 생각하기에도) 아주 건전한 내용들로만 즐기신다.
어느 면에서는 딸에게만 최적의, 상당히 이상적인 계획표였다.(고 나는 확신한다)
현실은 그냥저냥, 어쩌면, 되는대로 뒤죽박죽이었다.
저들 중 대개는 계획대로 굴러가지 않았다 물론.
마치 30년 전 나의 방학이 그러했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