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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하지) 않(은) 남매

이거 EBS에서 준 반찬 세트예요

by 그래도 나는 2024. 7.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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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남의 반찬이 이렇게 맛있는 거였어?"

"그렇게 맛있어?"

"응, 이렇게 맛있을 수가 있다니!"

"그 정도야?"

"어쩜 이렇게 맛있을 수가 있을까?"

그러니까 그것은 내가 만든 반찬이 아니라 남이 만들어 준 반찬이었다.

EBS가 보내 준 반찬이었다.

택배를 받을 일이 없는데 아침 일찍 오늘 택배가 도착할 거라고 문자가 왔다.

아니, 이것은 택배를 빙자한 사기 문자?

아니면 그 비슷한 무엇?

정말이지 최근 몇 년 동안 물건을 주문하고 택배를 받는 일이 거의 없다시피 했다.

주문 안 하고도 안 죽고 잘만 살 수 있었다.

물건을 사들이지 않아도 나는 쉽게 죽지도 않았다.

그런데 난데없는 택배 문자에 잠시 멍했다.

오호라, 가만 생각해 보니 올 것이 온 거였다.

두어 달 전에 '모닝 스페셜'을 듣다가 '무모한 문장'에 도전했다가 덜컥 당첨이 되는 바람에(?) '반찬 세트'를 선물로 받게 된 것이다.

가뜩이나 날도 덥고 입맛도 없고 먹기도 싫고 차리기도 귀찮았는데 잘 됐다.

독만 들지 않았다면, 맛이 없어도 아무 상관이 없을 터였다. 대충 한 끼만 어떻게 때워보자. 슬슬 그런 마음이 들자 오매불망 언제 그 반찬들이 도착하나 기다리게 되었다. 설레기까지 했다. 도대체 어떤 반찬들을 보냈으려나?

받고 보니 그냥 반찬 세트가 아니었다. 자그마치 '생일상 세트'였다. 언젠가 한 청취자가 마침 생일 근처였는데 그 택배를 받아서 무척이나 고마웠다는 사연을 보낸 적이 있었다. 무슨 복이 있어서 그이는 그런 선물에 당첨씩이나 됐을꼬? 그때는 그런 선물은 내겐 전혀 해당될 일이 없을 줄로만 알았는데 운 좋게 이번엔 내가 그 주인공이 된 것이다.

미역국 두 그릇, 진미채 볶음, 메추리알 장조림, 무말랭이 무침, 소불고기 이렇게 도착했다.

대단히 화려할 것은 없었지만 감은 눈이 번쩍 뜨일 만큼 천상의 맛은 아니었지만 많이 자극적이지 않고 가정식 비슷하게 만들어 낸 반찬들이었다.

내 생일을 아직도 멀었는데 갑자기 생일상을 다 받다니.

물론 생일상이라는 거창한 타이틀보다 나는 그럭저럭 한 끼를 저런 식으로 어떻게든 해결할 수 있게 된 데에 대해 고마울 따름이었다.

그런데 아이들이 의외로 '남이 만든' 반찬을 맛있어했다.

"엄마, 여기 반찬 맛있다. 남이 만든 것도 맛있네."

아들도 저녁을 먹는 내내 연거푸 저 발언을 일삼았다.

"그렇게 맛있어?"

"응. 하지만 엄마가 만든 배추김치도 맛있어."

양심은 있는 어린이다.

"그럼 너희도 '무모한 문장' 영작하는 것에 한번 도전해 봐. 당첨될지 누가 알아? 마침 방학도 했겠다. 시간도 많잖아. 어때?"

기회는 이때다 싶어 나는 미끼를 던졌다.

좀처럼 찾아온 어떤 기회를 결코 그냥 날려버릴 수 없는 엄마다, 나는. 뭐든 시도해 봐야 한다.

덥석 그 미끼를 물면 좋고 아니더라도, 아니면 뭐 그만이다.

그러나 딸은 솔깃해하다 말았고, 아드님은 침묵으로 일관하셨다.

최대한 편히 밥상을 차리려고 오늘 택배로 받은 반찬만 내놓고 저녁을 먹였다.

두 어린이는 배불리 저녁을 먹고 흡족한 표정으로 각자 할 일에 몰두했다.

오늘따라 늦게 퇴근한 그 양반도 나중에 합류했다.

"저번에 당첨된 반찬 세트 오늘 왔어. 이게 생일상 세트래."

"난 당신이 만든 반찬이 더 맛있는데."

입술에 침 좀 바르셨나 보다.

딸과 운동을 마치고 돌아와서 그 양반에게 후기를 요청했다.

"어땠어? 먹을 만했어? 애들은 맛있다던데."

"난 당신 김치가 제일 맛있더라."

뭐지?

앞으로 반찬은 나보고 쭉 다 만들라는 건가?

그게 어디 쉬운 일인 줄 아나?

나도 가끔 반찬을 사서 먹고 싶을 때가 있다.

남이 만드니까 뚝딱 마음만 먹으면 금방 만드는 줄 아나 보다.

하긴, 반찬이란 걸 언제 만들어 봤어야 알지, 그 일이 얼마나 머리 무겁고 신경 쓰이고 귀찮기까지 한 일인지.

안 해 본 사람은 저렇게 말은 잘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