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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하지) 않(은) 남매

한번은 울어도 돼, 워킹맘의 눈물

by 그래도 나는 2023. 5.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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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까지 육아휴직 3년을 하는 동안에도 하루하루가 미친 듯이 바빴다.

어떻게 된 게 출근하던 때보다도 하는 일이 더 많아진 것인지.

그 와중에도 문득 드는 생각,

'도대체 그동안 나 어떻게 애들 키우고 직장 생활한 거지?'

 

또래의 같은 사무실 워킹맘들은 9시가 되기 15분 정도 전에 머그컵을 하나씩 들고 매일 아침마다 창가로 모인다.

"언니, 우리 언제까지 이러고 살아야 해?"

나야말로 언제까지 이런 소리 듣고 살아야 해?

"왜 우리만 맨날 이런 말 하면서  살아야 되냐고? 남편들도 과연 사무실에서 서로 이런 얘기 할까?"

상상조차 안 되는 일이다, 아서라.

"우리도 좀 사람답게 살아보자."

그러게, 사람의 형상은 분명 갖추었으나 또 사람의 형상이 아니로다.

낳았으니 어쩌겠어, 책임은 져 줘야지.

자식은 낳는 순간 번뇌의 시작이니라.

 

참고로 남편에게 만에 하나, 혹시라도, 실수로라도 이런 대화를 남자들도 하는지 물어봤는데 저런 대화는 여태껏 들어 본 적이 없단다.

단군이 고조선을 세운 이래로.

 

아직도 선명한 그 풍경들.

머리카락은 세숫대야에 담갔다가 바로 빼기만 하고 왔는지 머리칼 끝에서 내 눈물인 것처럼 물이 뚝뚝 떨어지고, 미완성의 눈썹은 흐렸으며, 도자기 피부도 아닌 것이, 깐 달걀도 아닌 것이 '너는 자연인이다.' 그대로 사무실로 들어와 화장품 파우치 하나씩  들고 컴퓨터만 일단 켜 놓고 여자 화장실로 향한다.

 

조상 대대로 물려받은 선량한 미풍양속을 해쳐서는 안 된다는 의무감에.

태도가 불친절한 공무원 소리도 충분히 지겨운 마당에  외모까지 불친절한 공무원이 되고 싶진 않았으므로.

그런 2관왕은 전혀 영광스럽지 않다.

 

사무실에 막 출근할 때는 합격이 묘연한 공시생의 외모, 화장실에서 나올 때는 보무도 당당한 대한민국 공무원 워킹맘으로의 환골탈태.

 

그 당시 미혼인 여직원을 빼면 모두 맞벌이를 하고 있었는데, 다들 부부 공무원이었다.

생각해 보니 진짜 흔한 게 부부 공무원이다.

그 사무실 안에서는 같은 지자체 소속의 부부 공무원은 없었고 지역이 다르고 직렬이 다를 뿐이었다.

 

나는 일반행정 지방직이었고, 남편은 교육행정 지방직이어서 공무원은 공무원인데 뭔가 다른 점이 많았다.

나를 제외하고 나머지 직원들은 모두 일반행정직으로 근무하는 남편들을 두고 있어서 이 집이나 저 집이나  다들 비슷하게 돌아갔다.

 

뭔가 중요한 사건(?)이 터지면 둘 다 바쁘고, 을지훈련이라든지 비상근무라든지 이런 일이 생기면 피차 정신 없어지는 거다.

문제는 자녀들이었다.

당시는 아빠가 아이들을 어린이집에 데려다주고 출근한다는 말은 아무에게서도 듣지 못했다.

 

사정상 아주 일찍 출근해야 하는 남편도 있었으므로 새벽부터 어린이집 문을 두드릴 수도 없는 노릇이기도 했을 테니까.

같은 지자체에서 근무하는 부부 공무원은 정말 전국적으로 을지훈련이라도 있는 날이면 곤혹스러웠다.

너만 일찍 출근해야 하냐? 나도 새벽같이 나가야 한다.

모든 비상근무가 같은 시기에 이루어지니 여간 곤란한 게 아니다.

 

부부 공무원 좋다면서요?

움직이는 중소기업이라면서요.

중소기업이면 뭐해요, 당장 내 자식도 어쩌지 못하는데.

등에 한 명씩 업고 출근할 수도 없고.

부실한 그 중소기업의 어리고 철없는 애꿎은 사원들만 안됐다.

구조 조정이 시급해 보인다.

 

나중엔 부부 공무원의 경우 을지훈련 시에 영유아를 둔 공무원은 예외적으로 일찍 출근해야 한다는 의무에서 제외하기도 했던 기억이 있다. 그것도 둘 중 한 명만.

 

둘 다 면사무소에라도 근무하고 산불 비상근무 당번이라도 되면 주말에 엄마가 아이들을 데리고 출근하는 경우는 있어도 아빠가 아이들과 같이 출근하는 경우는 보지 못했다.

 

엄마들은 어떻게 해서든지 아이들을 보살피려 했다.

물론 반대의 경우도 있으리라.

지구 반대편 어느 나라이거나, 우리가 알지 못하는 저기 저 먼 별 나라에서라도.

 

내 아이들도 사정상 주말에 남편과 나 둘 다 출근이라도 하게 되면 내가 항상 데리고 출근하다시피 했다.

이제 겨우 기저귀나 떼고 제 손으로 밥이나 떠먹는 아이들만 집에 둘 수도 없는 노릇이었고, 친정 부모님께 맡기는 것도 하루 이틀이지.

게다가 나는 친정에서 첫째를 5년 넘게, 둘째도 3년 넘게 도맡아 길러 주셨기 때문에.

모두 나의 기쁨이고 나의 번뇌이니 내가 어떻게든 해결을 해야 했다.

 

워킹맘으로서 내가 눈물을 흘렸던 적이 딱 한 번 있었다.

 

남편은 그전부터 승진을 해야겠다며 교육청을 지원해 인사이동한 후였고 나는 승진이고 뭐고, 집안이나 건사하고 살자며 하루하루 탈 없이 보내는 것만이 내 최대의 목표로 삼았던 날들의 연속에 온몸을 다해 버텨나가던 시절이었다.

"나 이제 승진할 시기가 됐는데 교육청으로 들어가서 일 좀 해야겠어. 그러면 내가 자기 많이 못 도와줄 거야. 이해해 줘."

"언제는 뭘 많이 도와줬었어?"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남편도 그건 인정한다.

나 혼자 다 이고 지고 살았던 날들이었다.

 

도와준다는 말 그것부터가 잘못된 말이라고, 부부는 공동체 생활을 하는 사람들이니까 '같이' 하는 거라고 그렇게 말해도, 어쩌다가 손 좀 넣어주고는 대단히 많은 도움을 준 듯 행세하는 그 모양이 나는 못마땅했다.

 

"언니, 언니도 같이 일하는데 왜 언니가 혼자 다해?"

오죽하면 옆에서 보다 못한 동생들이 그렇게 얘기했을까.

아마 제정신은 아니었을 게다.

정말 무슨 정신으로 살았는지 모르겠다.

대한민국 워킹맘 중에 제정신으로 사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제정신이 아니어야 살 수 있다, 경험상.

 

놀랍게도 세상에는, 믿기 힘든 일이지만, 그럴 리가 없는데, 가사를 같이 하는 남편이 있다고 한다.

 

남편이 세탁기를 돌린단다.

청소기도 돌린단다.

자그마치 설거지를 하신단다.

먼 나라 이웃나라 얘기겠지.

 

나와 지금 같이 살고 있는 남편이 그때의 그 남편과 동일 인물인데 이 남편도 지금은 가뭄에 콩 나듯 뭔가를 하기는 한다.

근데 가뭄이 심한 때는 콩도 안 난다.

자꾸 물을 주고 관리해 줘야 콩도 돋아나는 것이다.

 

식세기 돌리기, 건조기 다 끝나면 코드 뽑기, 내가 해 놓은 밥 골고루 섞기, 밑도 끝도 없이, 내게 시도 때도 없이 사랑한다 말하기......

'사랑이라는 말의 의미를 모르는 건가?'

마지막 저것은 아니해도 좋을 말이다.

 

맞벌이인 우리 부부가 하나 합의 본 게 있다면 회식 얘기가 나오면 먼저 말하는 사람이 회식 보장권을 갖는 것이다.

일단은 그날 자녀 돌봄에서 벗어나는 것.

혹시 만에 하나라도 같은 날 회식이 잡히면 먼저 얘기하는 쪽이 회식에 참석할 보장권을 획득하고, 나중에 얘기하는 쪽은 알아서 회식을 가든지 말든지 어쨌든 아이들을 책임질 의무가 발생한다.

그래서 지나가는 말로라도 사무실에서 회식 얘기가 나왔다 하면 나는 바로 남편에게 알려줬다.

지체 없이.

 

난 아이 둘을 데리고 향우회 회식도 가 봤다.

"아이들 때문에, 아이들만 집에 있어서."

이런 말은 안 통했다.

다들

"남편 있잖아?"

이러는걸.

글쎄요, 가족관계 증명서를 보면 분명 배우자 자리에 누가 있긴 있어요.

 

내가 민원실에 있을 때였다.

계속 초과근무를 하며 미친 듯이 바쁜 날들을 보내고 있을 때였다.

남편도 일이 많아 밤 12시 안에는 집에 못 들어오겠단다.

안 들어와도 상관은 없지만, 애들은?

남편 역할까지는 바라지도 않아, 아빠 역할은 해줘야지.

 

"나도 일이 많은데?"

"민원실에서 초과할 일이 뭐가 있어?"

남의 편 맞다.

그냥 남이라고 하자.

우리 이제 막 남 됐어요.

 

전국의 민원실 직원들은 봉기할지어다.

한 번이라도 민원실에서 근무해 본 사람은 다들 느낄 것이다.

초과할 일도 종종 생긴다는 것을.

근무시간에는 밀려드는 민원인 처리하느라 바쁘고 뭘 집중해서 하기 힘든 경우가 많다.

과거 나는 취학통지서가 나갈 때쯤 500명 분에 달하는 취학 아동이  공동학군에 속하는 복잡한 일로 아이 한 명당 취학통지서를 7장까지도 만들어야 했던 일도 있었다.

게다가 안내문, 무슨 예방접종 어쩌고 저쩌고.

500x7=3,500

 

상식적으로 자꾸 공동 학군만 늘리는 게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교육청에서는 몇 년째 손을 놓고 있어서 답답했지만 아무 힘이 없는 공무원은 할 일은 또 해야 했다.

 

남편은 일이 많아 늦는다고 하고, 나도 그 못지않게 일이 많아서 일찌감치 초과 올렸는데 나보고 어쩌라고?

남편들은 약았다. 고 나는 혼자 생각한다.

남편들은 아내들이 '엄마는 어떻게든지 헤쳐나갈 수 있다'라는 걸 안다, 고 나는 또 혼자 생각한다.

그것도 아주 잘.

쓸데없는 직감이다.

물론 반대의 경우도 있으리라.

 

왜 항상 그런 식인지 나도 짜증이 났다.

혼자만 일해? 나도 일한다고!

애들은 도대체 어쩌라고 나한테 일방적으로 통보야?

 

심지어 첫째와 둘째가 다른 어린이집에 다니고 있을 때라 난 아침 출근길에 따로 데려다주고 출근을 했고 퇴근 때도 따로따로 데려왔다.

 

남편은 그쪽 방향이 아니라며 고속도로를 탔다.

이해해 달라며.

자꾸 이해, 이해 그러는데 그 이해라는 것 난 관심 없다.

 

내가 낳았는데, 누굴 탓하랴.

 

그렇다고 해서 애들만 생각해서 일도 안 하고 무작정 퇴근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아이들은 아이들이고 일은 일이다.

다행히 내 근무지는 집과 가까웠다.

 

일단은 퇴근을 해서 아이들을 집에 데려왔다.

한 시간 안에 둘을 씻기고 저녁밥을 준비해서 차려놓고 단단히 일렀다.

 

"합격아, 잘 들어. 엄마는 다시 일하러 가야 해. 아빠도 오늘 늦어. 집에 엄마도 아빠도 없어. 엄마 오늘 늦을 거야. 여기 차려 놓은 밥 먹고 다 먹은 그릇은 저기 싱크대에 넣어놔. 엄마 언제 올지 몰라. 아마 밤늦게 올 거야. 엄마는 일하는 사람이고 오늘은 일이 많아서 다시 회사 가서  일을 해야 해. 엄마 일이니까 다른 사람이 대신해주지 않아. 그리고 엄마는 그 일을 오늘 꼭 끝내야 하니까 지금 너희랑 같이 있을 수 없어. 밥 다 먹은 다음엔 바로 이 닦고 엄마 기다리지 말고 동생이랑 놀고 있어. 저 시계 보고 작은 바늘이 9를 가리키면 그때 잘 준비해. 엄마 기다리지 마. 많이 늦으니까. 기다리지 말고 방에 들어가서 이불 잘 덮고 불 끄고 먼저 자. 알았지 우리 딸, 잘할 수 있지?"

"응, 엄마 할 수 있어."

 

저녁 6시부터 7시까지는 초과근무 시간으로 쳐 주지도 않고 저녁은 먹어야 했으므로 나도 간단히 밥을 먹고 나왔다.

아이들과 속도를 맞출 수가 없었다. 난 우선 할 일이 있었고 어떻게든지 빨리 가서 일하고 빨리 돌아올 생각뿐이었다.

 

일하는 동안은 아이들 생각 안 난다. 희한하게.

그래도 속으론 남편이 '나보단 먼저 와 주겠거니' 하는 근거 없는 믿음을, 쓸데없는 믿음을, 얼토당토않은 믿음을 조금 가졌었다.

 

어떻게 일을 했는지도 모르게 밤 11시가 넘어 집에 돌아왔다.

거실은 캄캄했다.

 

불을 켜고 부엌으로 가니 싱크대 안에 아이들이 먹은 밥그릇이 다정히 포개져 있었다.

화장실에 가 보니 서툰 양치질을 마친 두 개의 칫솔에는 물기가 흥건히 젖어 있었고,

방문을 열어 보니 남매는 사이좋게 나란히 누워 이불도 잘 덮고 곤히 자고 있었다.

 

처음이었다.

잠든 아이들을 바라보는데 눈물이 왈칵 쏟아졌던 건.

자는 아이들 모습이 예쁘다기보다 차라리 애처로웠다.

 

아들이 4 살, 딸이 6살 때의 일이다.

두 개의 젖은 칫솔 위로 내 눈물이 더해져 그날 밤 아이들의 칫솔은 더디 말랐으리라.

 

(이 글은 당시 나의 느낌과 격앙된 마음이 고스란히 담겨 있음과 동시에 남의 편에 대한 내 마음을 지극히 감정적으로, 솔직하게 작성한 것임을 밝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