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런 남편 세상에 한 명만으로 족하다. 그 이상은 안된다.
다소 큰소리가 오가고 서로 의원면직을 하네, 그것만은 안되네(이것도 어디서 많은 본 풍경) 승강이 끝에 남편은 나와 말을 끝낸 후에 바로 다음 날 우체국에 출근해서 사직서를 쓰고 오전에 곧장 집으로 와버렸다.
지금 생각하면 참으로 무모하고 철없는 행동이었다고 그도 생각한다.
인수인계고 뭐고 아무것도 없었단다.
"지금 그렇게 하라면 절대 그렇게는 못할 것 같은데 그땐 뭘 몰라서 그랬나 봐."
최근 남편이 회상하기를,
"그때 나도 진짜 막 나갔던 것 같아. 그만둔다고 바로 사직서 쓰고 우체국장까지 만나고 그 길로 끝내고 집에 와버렸으니까."
"우체국 사람들이 다 말렸다며? 나중에 후회할 거라고."
"그랬지. 우체국이 이직률이 좀 높은 편이잖아, 다른 공무원에 비해서. 다들 조금 다니다가 못하겠다고 그 소리부터 하는 신규자들이 많으니까 처음엔 거기서도 내가 그런 사람인 줄 알고 결사적으로 말렸다니까."
"그때 그 동기들 중에서도 그만둔 사람 있었다고 한 것 같은데?"
"몇 명 있었지. 교행으로도 가고 일행으로도 가고 여기저기 가더라."
"그 동기들한테 못된 것만 배웠구먼?"
"나는 내가 그만둔다고 하면 그냥 아무 소리 않고 사직서 받아 줄 줄 알았거든? 근데 진짜 진심으로 말리더라고. 거기 팀장님이랑도 면담하고 우체국장님이 보자고 해서 또 올라가서 한 시간도 넘게 면담하고. 같은 팀 직원들도 다들 철없이 그냥 해 본 소린 줄 알고 뜯어말리고. 나 결혼한다고 결혼식장까지 차 빌려서 우체국에서도 직원들이 많이 와 줬는데 다들 황당해하더라. 신혼여행 갔다 오자마자 그만둔다고 하니까."
아이고 이 양반아, 그 사람들이 나만큼 황당하기야 하겠냐.
어차피 그 사람들은 남인걸.
"아이고. 나가 주는 게 도와주는 건데 왜 그렇게 다들 O 대리를 말리셨대?"
당시 남편은 우체국에 가자마자 대리였다.
어떻게 무슨 기준으로 그러는지는 잘 모르겠으나 신규자도 일단 '대리님'이다.
대리라고 하니까 우체국 근무 10년쯤 한 중년 아저씨 같다고 내가 그런 말도 했었다.
나는 대리님 사모님으로 얼마 살아 보지도 못했다.
"그냥 처음에 힘든 거 못 참고 충동적으로 결정한 줄 알았나 보지. 계속 나를 설득하려고 하고 달래면서 우선 병가라도 쓰고 쉬었다 오라고 그랬어."
정말 공무원들 병가 쓰는 거 좋아한다.
아프면 병가 쓰는 게 당연한 거지만, 당시 남편은 29세, 사지 육신 멀쩡한, 멀쩡하긴 한데 딱히 신체 건강하다고는 자신 있게 말하기 힘든 그런 상태였다.
어디 몸 아픈 데도 없이 갑자기 병가 쓰는 것도 안 맞고, 남편의 의지는 확고했으므로 그 수많은 염려와 근심 어린 시선을 외면하고 끝을 내버렸다.
"나처럼 조금 일하고 다른데 시험 보겠다고 우체국 그만두고 나갔다가 후회하는 사람들 많이 봤다고 계속 팀장님이 나보고 다시 잘 생각해 보라는데. 나중에 분명히 후회할 거라고. 오히려 자기한테 그때 붙잡아 준거 고맙다고 인사할 날이 분명히 올 거라고. 이미 마음이 떠나버렸는데 다시 생각하고 말고 할 것도 없으니까. 내가 인재는 인재잖아"
잘 나가다 왜 이러실까.
'인'이란 한자는 뜻이 여러가지야. 잘 생각해 봐.
얼씨구. 그렇게 잘 아는 사람이 왜 내 의원면직에는 그렇게 적극적으로 결사반대를 했누?
"그래서 그때 일 그만두고 오니까 속이 시원했어?"
"시원했다기보다 마음이 좀 그렇더라고. 나 공무원 시험 본다고 어렵게 고시원에서 혼자 공부할 때도 생각나고."
"그래? 그럼 그때 전 여자 친구랑 같이 공부했었다며. 그 여자 친구 생각도 났겠네?"
"무슨 소리야 지금. 그 얘기가 왜 나와 지금?"
"물어보지도 못해. 생각 안 났음 생각 안 났다 하면 될 걸 가지고 왜 과민반응이셔?"
"느닷없는 소릴 하니까 그렇지. 갑자기 그 얘기가 왜 나오냐고?"
"별것도 아닌 일에 신경질이네."
"아 됐어 돼! 얘기 그만해."
나의 기쁨, 나의 고통.
언제쯤에나 처음부터 끝까지 발끈하지 않고 대화란 걸 해 볼 수 있으려나.
이래서 '부부는 5분 이상 긴 대화는 금지'하는 법이 속히 마련돼야 한다.
어길 시 처벌을 강화하면 의무감에서라도 잘 실천할 수 있을 것 같다.
* 평소 농담을 많이 하며 대화하는 방식이니 오해는 없으시길 바랍니다.
남편은 그 당시 우체국을 나오고 잠깐 눈시울이 약간 붉어지려다 말았다고 했었지 옛날 옛날 나에게 말하기를.
당시 나는 자가용이 없었고 남편은 무직인 공시생 신분이었으므로 내가 출근하는 길에 나를 사무실까지 태워다 주고 근처 도서관으로 가서 공부를 하고 내가 퇴근하는 시간에 맞춰 다시 나를 태우러 오는 식이었다.
기가 막히게도, 어쩌면 철저한 계산에서였는지는 모르겠으나 전에 근무하던 우체국에서 퇴근하고 오면 아마도 그쯤이려니 싶은 바로 그 시각에.
"어쩌면 남편이 저렇게도 자상할까. 너는 무슨 복이 많아서 저런 신랑을 만났냐. 아이고 지극정성이다 얘. 아침마다 부인 태우고 출근길에 바래다주고 자기 직장으로 출근하고 끝나면 잽싸게 또 부인 퇴근길에 태우러 와줘. 얼마나 좋냐. 요새 저런 남자 없다 너? 일 끝나고 피곤하면 술 한잔하기도 하고 그러고 싶기도 할 텐데 그저 부인 모시고 가려고 매일 사무실까지 운전하고 오는 것 좀 봐. 여간 착실한 게 아니라니까. 게다가 공무원이잖아. 너보다 세 살 더 어리다며? 그럼 너보다 정년이 3년이나 더 늦잖아. 부부공무원은 움직이는 중소기업이라잖니. 넌 좋겠다 얘!"
같이 일하는 언니들 말이다.
동네 사람들, 속 모르는 소리 좀 하지 마소.
언니들, 정신 바짝 차리고 내가 지금부터 하는 말 잘 들어야 해.
어쩜 저렇게 자상하냐고?
본인은 직장을 안 다니고 내가 직장을 다니니까 좀 태워 줄 수도 있는 거지. 자상하곤 상관없는 것 같네.
본인이 필수서류 제출 안 해서 민원처리 안 해주면 무조건 불친절하다고 막무가내로 나가는 민원인하고 묘하게 닮았는걸?
무슨 복이 많아서 저런 신랑을 만났냐고?
그것도 복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인가 과연. 세상에 저런 복도 다 있나 싶소.
아마도 전생에 나라 몇 개 팔아먹은 정도가 아니라 아마도 이 지구를 외계인 악당에게 팔아먹어버린 그 대가로 이렇게 업보를 받는가 보오.
지극정성이라고 했소 지금?
정성인지는 모르겠고, 단순히 남편이 도서관 가는 길에 그냥 나 태우고 오는 것뿐이라오.
출근길에도 부인 바래다주고 퇴근길에 또 부인 태우러 와 주신다고? 무려 하루에 두 번씩이나?
말은 정확히 합시다. 저 사람은 지금 직장을 안 다녀요. 그래서 나 출근 시간에 맞춰 그냥 같이 움직이는 것뿐이에요. 우리 가정에 수입이 반으로 줄었으니까요. 한 푼이라도 아껴 봐야지요. 이제 결혼한 지 고작 일주일 넘었는데. 나도 살아야지요.
요새 저런 남자 없다고요?
없죠, 암만. 없고 말고요.
정말 저런 남편 또 없습니다.
있어서는 안 되죠.
일 끝나면 피곤할 텐데도 매일 내 사무실까지 와 준다고요?
도서관을 다닌다고는 말은 들었는데 정말 공부를 하고 있는 건지 어디 어슬렁거리다가 퇴근 시간 맞춰 오는 건지는 나도 잘 몰라요. 피곤할 수도 있겠죠. 공부를 하든 어슬렁거리다가 오든.
술 한 잔 마시고 싶기도 할 거라고요?
마시고야 싶겠지요, 지금 당장 본인 인생이 괴로우니. 하지만 마시는 건 물만 허락했어요.
생수도 아니 됩니다, 수돗물이어야만 해요.
공시생이 마시는 건 물뿐이야.
어디서 감히 자판기 코피를 마시려고 드는 게지?
그 동전 도로 주머니에 집어넣도록.
'막심' 코피 한 상자 사서(그것도 코피 추가 증정 및 텀블러라도 사은품으로 껴서 줄 때에 한해서) 딱 한 봉지만 뜯어.
그리고 집 앞까지는 가장 깨끗하다는 자랑스러운 대한민국 K-watet 수돗물 양껏 받아서 텀블러에 담아 가도록.
태도에 따라서 두 잔까지는 허용하겠어.
다 본인 하기에 달렸어.
항시 내가 지켜보고 있단 거 잊지 마.
하나님께서 매일 여자의 눈물방울을 세고 계시듯, 난 퇴근 후에 제일 먼저 스틱 코피 잔량을 세어가며
'코피 수불대장'을 작성할 테니까.
방심하다간 큰일 나.
좋게 좋게 합시다.
전결, 대결 이런 거 꿈도 꾸지 마.
매일매일이 그저 감사기간 이려니 생각해.
당신은 지금 공시생이야.
사람 아니야.
공시생은 물만 마시는 거야.
'남의 것은 보기만 하는 것. 함부로 만지는 게 아니란 것'과 같은 맥락인 셈이지.
술 한 잔 값이라도 아껴서 문제집 하나라도 더 사보고 인강 하나라도 더 들어야죠.
난 내가 감당할 수 있는 선에서만 감당하고 살 거랍니다.
남편도 '결핍'을 경험해 볼 필요가 있어요.
이거 다 다시 공무원이 되면 피와 살이 되는 자양분이어요.
나보고 인색하다고 하지 마셔요, 섣불리.
본인이 그렇게 하기를 간절히 원했으니까.
이제 1년 된 공무원 월급 빤한 거 언니도 잘 알잖아요.
그렇다고 남편 문제집 산다고 내 명의로 대출받을 순 없잖아요.
내 명의는 소중하니까.
합격할 때까지 사람답게 사는 건 포기해야 해요. 그나마 한 번 해 본 사람이라 두 번째는 좀 더 나으려나?
공시생은 '나는 사람이 아니다.' 이런 마음으로 살아야 해요.
그렇게 독한 마음 없이는 합격도 없어요.
착실하다고? 착실하다고요?
암요. 끝까지 말리는데도 팀원들, 팀장님, 우체국장님 돌아가며 다 면담하고 끝까지 설교, 얘기 다 듣고 우체국 다 돌아다니면서 인사하고 할 만큼은 다 하고 사직서 썼으니까요.
여기까지는 나도 다 괜찮다.
그가 의원면직을 한 사실을 전혀 모르는 언니들이니까.
내가 사무실에 알리지도 않았고, 남의 부부 생활에 대해 누가 관심도 없는데 굳이 내가 먼저 나서서 '우리 집 양반 일 관뒀소.' 이러는 건 좀 아니잖아.
너 좋겠다~ 이러면서 남의 속도 모르고 그가 얼마나 엄청난 일을 저질렀는지도 모르고 나보고 무작정 좋겠다니.
그래. 맞아 언니. 나 좋아 죽겠어.
나 갑자기 죽으면 너무 좋아서 죽은 줄 알아요......
혹시라도 사망신고서를 작성한다면, 사망의 직접 사인은 뭔지 몰라도 '너무 좋아서'가 되겠지.
그래 여기까지도 괜찮다 치자.
님아, 마지막 그 말은 하지 아니하였어야 옳았다.
'게다가 공무원'이라고라?
아니거든요.
온갖 만행을 일삼는 데다가, 자그마치 '게다가 공시생'이거든요.
부부공무원은 움직이는 중소기업이란 소리 그만하셔요.
그 중소기업 며칠 전에 파산하고, 초저녁에 부도났어요.
그 중소기업 세무서에 사업자등록하자마자 일 치렀다고요.
간판도 못 걸어보고.
남들 보기엔 무조건 남편은 최고다.
착실히 공무원 생활 잘하고 아침저녁으로 부인 바래다주고 모시러 오고 술을 마시러 돌아다니길 하나 어쩌길 하나.
하지만 남들이 간과하고 있는 치명적인 사실 하나.
결혼하고 며칠 만에 의원면직해 버린 것.
적어도 나처럼 10년 정도는 해야 의원면직의 '의'라도 얘기 꺼내 볼 수 있는 거 아냐?
어차피 다 지난 일 되새김질 해서 무엇하겠냐마는.
나중에 나의 사무실에서도 남편이 의원면직을 했다는 사실을 몇 명이 알게 되었다.
그 바닥 정말 좁아도 좁아도 그렇게 좁을 수가 없다.
비밀이란 게 없다.
얼마나 공개 행정을 좋아하는지.
정보공개 청구도 안 했는데 저절로 멀리멀리 그가 그만뒀다는 사실이 알려졌다.
이에 사람들은,
아니 어떻게 결혼하자마자 그럴 수가 있느냐, 혼자 벌어서 어떻게 살려고 그랬다냐, 네 월급이 얼마나 된다고, 지금 둘이 바짝 벌어서 모아도 시원찮을 판에, 아무리 나이가 어려서 철이 없어도 그렇지 결혼까지 한 마당에 그런 큰일을 저질러 버리면 어쩐단 말이냐, 너 혼자서 얼마나 고생이 많냐, 네가 책임감이 무겁겠다, 왜 그런 사실을 얘기도 안 했냐, 여태까지 어쩌면 숨기고 있을 수가 있냐, 앞으로 너 큰일이다 쯧쯧......
아! 정말 남의 일에 진짜 관심 많다.
지나치다.
뭐든 적당히 합시다.
듣기 좋은 꽃노래도 한두 번이지.
물론 걱정스러운 마음에 그러셨다는 건 잘 알겠지만 그런 소리 듣는 것도 처음 한두 번이다.
티끌같은 잔소리도 모이고 쌓이면 태산을 이룬다.
당사자인 나는 만나는 사람마다 그런 소리를 해대면 머리가 지끈거릴 지경이다.
사무실 안의 다른 모든 직원들이 그 사실을 알게 됐는지 일부만 알게 됐는지, 다 알고도 모르는 척해주는 건지는 몰라도 내 입장에선 이미 사건은 벌어졌고, 달라질 건 아무것도 없었으므로 나름대로 평화로운 일상을 이어갔다.
나는 나대로 내 맡은 일이나 열심히 하고, 남편은 남편대로 공시생 신분에 맞게 생활해 나가면 될 터였다.
각자 자기 임무에 충실하도록!
다만 아무것도 모르는 옆의 언니들이 침이 마르고 닳도록, 동해물과 백두산까지 마르고 닳도록 남편 칭찬을 하는 날이면 속이 꽉 막히고 답답한 건 나도 어찌해 볼 도리가 없었다..
그렇다고 남편이 일 그만두고 도서관 다니는데 가는 길에 그냥 나 태워주는 것뿐이라고 이런 말 저런 말하기도 그렇고 해서 별말은 안 했을 뿐이다.
예로부터 침묵은 공시생 남편을 둔 새댁의 오랜 미덕이니라.
한 번 얘기를 꺼내면 걷잡을 수 없이 활활 불길이 타오르고 타올라 영원히 꺼지지 않은 것만 같은 불길한 예감 때문에 침묵으로 일관했다.
아무리 함께 일하는 사람들이라 하더라도 내 개인적인 사항에 대해 다 알려주고 공유할 필요성은 느끼지 않았다.
새삼 공유하지 않아도 되는 기쁨을 알았다.
그리하여 나의 기쁨, 나의 고통은 언니들 사이에서만(+남편의 신상 변화를 모르는 직원들) 이 시대에 최고로 자상하고, 가정에 충실하며 부인에게 끔찍한, 그야말로 세상에서 둘도 없는 (일을 낸) 남편으로 여기저기서 회자되고 있었다.
(2022. 8.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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