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흔(하지) 않(은) 남매

손주야, 오지 말아라

by 그래도 나는 2024. 8. 4.
반응형

 

"엄마도 오지 말라고 하고 어머님도 오지 말라고 하고..."
 
엄마의 셋째 며느리가 하소연을 했다고 한다.
하필이면 그날 내가 남매를 데리고 친정에 가서 하룻밤 재우고 갈 계획으로 친정에 도착한 날이었다.
나는 그만 뜨끔했다.
"엄마, OO이네 휴가 때 온다며 안 오네?"
"내가 오지 말라고 했다."
"왜?"
"날도 더운데 뭐 하러 오냐?"
"하긴 여름에는 아무도 안 반갑긴 하지."
7월 말이 되어 갈 때쯤이었다.
동생네는 아마도 그날만 기다리고 있었을 것이다.
나도 그렇고 동생네도 그렇고, 내 친구네도 그렇고, 방학을 맞이한 어린이를 둔 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깊은 시름에 잠기기 시작하는 계절이 바로 한여름이다.(라고 나는 확신한다)
차라리 겨울 방학은 더 나은 것 같다.
여름 방학은 정말 많이 힘들다.
당장 내 몸이 힘들어지니 매사에 의욕이 없어지고 아이들 끼니를 챙겨 주는 기본적인 일조차도 짐스럽다.
아마도 동생네도 나와 같은 마음에 부모님 댁으로 당분간만이라도 피신(?)을 할 심산으로 그렇게 계획했었던 것 같다.
"아이고, OO이네 오다고 한디 날은 덥고 성가시다."
"방학하니까 데리고 올 건가 보네."
"여름에는 내 식구도 귀찮다."
엄마는 급기야 폭탄선언을 하셨다.
'내 식구'라 함은 딱 부모님 두 분을 가리키는 것인가, 혹시라도 '나를 포함한 외손주 두 명'까지 포함된 것인가?
아무리 잽싸게 머리를 굴려 봐도 그 범주가 어디까지인지 짐작조차 가지 않았다.
더워서 나도 가급적이면 친정에 안 가고 있다, 요즘은.
엄마가 먼저 오라고 하기 전에는 절대 가지 않는다.
그래도 최소한 일주일에 한 번 정도는 가게 된다. 물론 엄마가 각종 농산물을 다 준비해 놓고 가져다 먹으라고 하시니까 가는 것뿐이다.
'에어컨도 고장 난 차'를 몰고 왕복 한 시간 가까이 운전하는 일은 내게도 가혹한 일이다.
동생네가 집에 오겠다고 중대발표를 하고 나자 엄마는 신경이 쓰이기 시작하신 것 같다.
몸도 안 좋아서 부모님 두 분만 집에서 지내기도 벅찬 때가 바로 여름이다.
그렇다고 해서,
"날도 덥고 엄마 힘든데 뭐 하러 오려고 그래? 오지 마!"
라고 남동생에게 당장 전화를 걸어 만류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누나는 걸핏하면 가면서 왜 나는 못 가게 해?"
라고 동생이 따지고 들면 나는 또 할 말이 없기 때문이다.
거기서 여기까지 오려면 반나절에서 하루는 걸리는데 힘들게 굳이(힘들어도 내가 힘들지 누나가 무슨 상관이냐며 동생이 따지면 난 또 할 말도 없긴 하다) 올 필요가 있을까, 하고 나 혼자만 그렇게 생각했다.
작년 겨울 방학 때 하나뿐이 남동생네 아들이 어린이집 방학을 하는 바람에 며칠 친정 부모님이 봐주신 적이 있었다. 물론 나도 어쩔 수 없이(엄마 혼자 힘들어하시는데 나서지 않을 수도 없었다) 조카를 집에 데리고 와서 반나절 정도 같이 지낸 적이 있었는데, 혈기왕성한 6살 남자 어린이는 내가 감당하기도 무척이나 힘들었었다.
"고모, 나 다음에 또 고모 집에 가도 돼? 다음엔 고모 집에서 잘래!"
라고 그 깜찍한 어린이가 내게 말했을 때 나는 선뜻 
"당연하지. 언제라도 대 환영이야!"
라고는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미안하다, 조카야.)
아마도 엄마는 그때의 기억이 되살아나서 막내아들네의 방문에 손사래를 쳤을지도 모를 일이다.
 
"OO(=막내며느리)가 한낮에 무슨 압력솥 돌아가는 소리가 나냐고 그러더라."
남매를 데리고 친정에 갔던 날 마침 엄마는 외손주들이 오랜만에 방문한 기념으로 압력솥 가득 옥수수를 찌고 계셨다. 공교롭게도 그때 막내며느리가 전화를 한 것이다.
"합격이네 애들이 하룻밤 자고 간다고 와서 지금 옥수수 찐다고 했다."
라고 엄마는 겸연쩍게 말씀하셨다.
"아니, 어머님! 저희는 오지 말라고 하시고 언니네(=올케는 나를 언니라고 부른다)는 허락해 주신 거예요? 게다가 하룻밤씩이나 자고 갈 거라고요? 너무 하시는 거 아니에요? 외손주들은 둘이나 오라고 하시고 친손주는 겨우 한 명인데 못 오게 하시는 건가요? 이거 차별 아니에요? 왜 외손주는 되고 친손주는 안되는 건가요? 어머님이 너무 편애하시는 거 아니에요?"
라고는, 다행히 막내며느리는 시어머니에게 항의하지 않았다.
대신 그녀는 시무룩하게 말했다고 한다.
"어휴, 우리 엄마도 집에 오지 말라고 하시고, 어머님도 오지 말라고 하시니까 갈 데가 없네요, 어머님."
이라고만 말했다고 한다.
만에 하나 그녀가 시어머니가 딸네 가족은 허락해 주면서 막내아들네는 허락하지 않아서 서운해하는 건 아닐까 살짝 제 발이 저리려고까지 했다.
어쨌든 나는 친정에서 특혜를 받고 있는 셈이었으니까.
내 아이들이 가고 싶다고 하면 항상 엄마는 오라고 흔쾌히 허락해 주셨고 하루고 이틀이고 자고 싶다고 하면 그때도 단 한 번도 거절한 적이 없으시다.(다만 이런 일급비밀이 엄마의 막내며느리에게는 발각되지 않기를)
"여름에는 자식도 손주도 하나도 안 반갑다. 날도 더워서 다 귀찮다."
엄마는 여름이면 종종 그렇게 말씀하신다.
설마 거기에 나까지 포한되는 건 아니겠지?
어디까지나 나는 엄마가 오라고 하실 때만 가는 거니까 나는 제외겠지?
하긴, 나부터도 여름엔 어디 가고 싶지도 않고, 누가 집에 오는 것도 안 반갑긴 하다.
아무리 손주들이 예뻐도 친할머니든 외할머니든, 그건 아마도 계절에 따라 약간 다른 것도 같다.(고 나만 느꼈다) 할머니들의 손주 사랑은 무더위를 이기기 힘겨워 보였다.
할머니들의 사정도 생각해 줘야 한다.
무조건 손주들을 반길 거라는 착각, 그건 정말 자식들의 착각일지도 모른다.
그나저나 다음 주에 시어머니 생신이라 시가에 간다고 하는데 최대한 빨리 돌아오는 게 시부모님을 위한 것일까, 자주 못 보니까 최대한 머물 수 있는 만큼 머물다 오는 게 시부모님을 위한 것일까.
아마도 확실한 건, 이것저것 따질 것도 없이 시부모님의 아들이 가자고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면 따라나서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