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방학은 왜 한 달 밖에 안 하는 거야? 두 달쯤 하면 좋을 텐데. 너무 짧아."
제 아빠에게 설교 말씀을 한 차례 듣고 밀린 방학 숙제를 부랴부랴 하면서도 딸은 제 할 말을 다 했다.
"아니, 너 정말! 넌 무슨 어린이가 그렇게 이기적인 거라니? 넌 왜 너 밖에 몰라? 이 엄마 생각은 눈곱만큼도 안 하는 게야? 방학이 한 달이면 됐지, 무슨 두 달씩이나 바라? 넌 참 꿈도 야무지구나. 세상에 방학을 두 달씩이나 하면 도대체 어쩌란 말이야? 이 엄마 탈진하는 거 보고 싶어서 그래? 무슨 어린이가 그렇게 욕심이 많아? 생각만 해도 숨이 턱 막힌다 얘!!! 행여 어디 가서라도 그런 말 하덜덜 말아라."
라고는 딸 앞에서 본심을 드러내지 못했다, 물론.
"내가 30분 정도 잔소리 좀 했어. 방학 숙제를 아직도 안 했다니까."
토요일 아침 일용할 양식을 공수해 온 내게 남편은 두 자녀의 비행을 내게 고발했다.
"그냥 놔두지 그랬어. 안 해가서 혼도 나고 해 봐야지. 나도 숙제하라고 그렇게 말을 했는데 그냥 혼도 나 보고 하라고 더 얘기 안 했어."
개학 2주 전부터 방학 중간 점검을 하면서 개학을 대비해 숙제를 미리 하라고 그렇게 말했건만 아이들은 내 말에 콧방귀도 안 뀌었다.
그러나 제 아빠 말에는 주말도 잊고 밀린 숙제에 매달릴 수밖에 없었다.
"어때? 한꺼번에 하려니까 너무 힘들지? 미리 했으면 지금 이렇게 급하게 하지 않아도 됐을 텐데. 하지만 이건 다 너희가 자초한 일이란 건 알지? 방학 내내 신나게 놀기만 한 과보를 이렇게 받는구나. 자신이 지은 과보는 절대 피할 수 없다는 걸 이제 알겠지?"
짐짓 고소해하며 아이들에게 잔소리했지만 남매는 각자 제 할 일에 바빠 듣는 시늉도 안 했다.
최소한 토요일 오전까지 숙제를 다 마치도록 하라는 아빠의 지시사항이 있었으나 딸은 정해진 시간에 구애받는 행동 따위 전혀 하지 않으셨다.
"너희 외할머니 집에 갈래?"
토요일 오후에 넌지시 한 말에 딸은 숙제거리를 챙겼다.
"그래. 거기 가서라도 하면 되지. 그럼 일단 챙겨 봐. 엄마 깻잎 딸 동안 하고 있으면 되겠다."
하지만 외가에 도착한 남매는 안방을 차지하고서 방에 널브러져서 그들의 시선을 사로잡는 영상매체에 온 정신을 다 빼앗겼다.
충분히 예상한 일이다.
어쩌면, 그 소일거리를 챙겨가는 것 자체가 모순이었다.
화려한 영상매체 앞에서 따분한 그 소일거리가 힘이나 쓸 수 있었겠는가.
방학 숙제 마치는 일은 그렇게 하루 더 연장전에 들어갔다.
"이제 다 했다. 정말 힘들었어."
간신히 방학 숙제를 마친 딸은 진저리를 치며 해방감을 느낀 듯했다.
"어때? 이번 일을 계기로 뭔가 깨달은 게 있겠지? 숙제는 미리 하는 게 좋겠지? 한꺼번에 하려니까 너무 힘들잖아."
주책없이 나는 진이 빠진 딸에게 훈계하려 들었다.
"엄마, 정말 그래. 이번에 뼈저리게 느꼈어. 뭐든 미리미리 하는 습관을 길러야겠어. 닥쳐서 하려고 하니까 너무너무 힘들어. 엄마 말이 다 옳아. 진작 엄마 말 들을 걸. 다음부터는 꼭 미리 해 놔야겠어."
라고,
딸이 대답할 줄 알았다.
그러나, 돌아오는 대답은 나의 예상을 뛰어넘었다.
"괜찮아. 어차피 하기는 다 했잖아. 그래도 내일 아침까지 안 한 게 어디야? 꼭 미리 할 필요는 없어. 하기만 하면 되는 거니까. 이 방법도 괜찮네. 어쨌든 했다는 게 중요한 거지."
라면서 의기양양했다.
"그래. 네 생각이 그렇다면 네 일이니까 너 알아서 해. 근데 내일 학교 갈 준비는 다 했어? 준비물 같은 건 미리 챙겨놔야 하지 않아?"
방학숙제에서 개학 준비물로 관심을 대상을 옮겼으나 이 역시 마찬가지였다.
"챙겨갈 거 없어. 그리고 아직 시간이 많이 남았잖아. 이따가 하면 돼."
하긴 일요일 오후 3시면 개학날인 다음날 월요일까지는 갠지스강의 모래알만큼이나 많은 시간적 여유가 있긴 하지.
결정적으로 그 모든 게 네 일이고 말이지.
일요일 늦은 오후에 남매는 느닷없이 종이접기를 하질 않나 방과 후 수업으로 했던 로봇과학 제품을 꺼내 조립을 하질 않나, 책장에 있는 책을 있는 대로 꺼내 보면서 거실을 초토화시켰다.
개학을 대비해 등교 워밍업이 절실한 시각에 마치 이제 방학 첫날을 맞은 어린이들처럼 한동안 거기에서 헤어 나오지 못했다. 오랫동안 집에만 있었으니 등교 준비에 심혈을 기울여야 하는데 전혀 그런 쪽에는 관심이 없어 보였다.
맹세코 한 달 동안의 방학 기간 중 그 오늘만큼 열성을 보였던 날이 없었다.
자그마치 온 거실을 난장판으로 만들면서 말이다.
안되는데, 이러면 안 되는데, 이러다가 무리해서 병이라도 나면 안 되는데, 학교에 가야 하는데, 반드시 등교를 해야만 하는데, 내게 광명의 날이 하루 앞으로 바짝 다가왔는데...
머리 복잡한 내 마음만큼이나 잔뜩 어질러진 거실을 보고 있으려니 가슴이 답답했다.
아주 깔끔한 성격도 아니고 정리를 아주 잘하지는 않지만 어질러져 있는 모습을 보면 이젠 거슬린다.
물론 치우는 일은 아이들 몫이지만 말이다.
차라리 안 보는 게 상책이다.
마음 같아서는 남매가 저녁 7시부터 잠자리에 들어 다음날 아침 일찍 학교에 갔으면 좋겠지만 너무 가혹하게 대하지 않기로 한다. 한 달도 잘 살았는데 하루도 안 남은 시간 그까짓 거, 조금만 더 견디면 내게도 좋은 날이 오리니.
일요일 오후,
아이들에겐 가는 시간이 아깝고, 엄마에겐 이왕이면 시간이 두 배로 빨리 흘렀으면 좋겠다는 마음 간절한,
오늘은 즐거운 개학 이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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