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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원면직-일반행정 지방직 아내의 공무원 그만두기

공무원 시험준비는 그만하고 시집이나...

by 그래도 나는 2023. 8.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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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무원 시험은 이제 그만두고 아빠랑 같이 진액이라도 만들면서 살자."

 연봉 협상도 없이 갑작스러운 스카우트 제의를 받았다.
아빠로부터.
특별히 내세울 것 없는 무기력했던 취준생에게 솔깃한 제안이었다.
2009년에 나는 서른 살이 되었다.
뭘 했는지도 모르게 시간은 잘도 가더라. 
시간이야 항상 흘러가고 있었지만 내 삶에 알맹이가 없어서 그런지 '시간만 잘 가는 느낌'이랄까.
서른이면 나도 어른이 되고 직장 생활도 하고 더 이상 어리숙하지 않을 줄 알았다. 
착각이었다. 
마흔을 넘기고 두 해를 더 산 지금도 마흔 같지 않은걸.
하물며 어른이라니 더더군다나. 
 
그만큼  불합격해 봤으면 포기할 만도 했을 텐데도 서른까지 수험생활을 꾸역꾸역 이끌고 오던 나는 그제야 비로소 뭔가 결단을 내릴 때라고 생각했다.
당장은 '공무원 불합격 수기'를 쓰는 게 가장 어울렸지만, 누구보다도 잘 쓸 자신이 있었지만 마지막 한 번만 더 눈을 질끈 감고 중대한 결심을 한다. 

 
결혼할 상대도 없어, 아빠의 제안을 받아들일 마음도 전혀 없어, 그러면 관성의 법칙에 맡기는 거다.

장수생에게는 합격에 대한 자신감과는 전혀 무관하게 하던 수험공부를 계속하려는 습성이 있다.

불성실한 수험 생활을 하는 동안 많은 일들이 있었고, 급기야는  보다 못한 아빠가 구원의 손길을 내민 셈이지만 잡을 수가 없었다.
앞서 친척으로부터 면사무소 임시직 근무 제안을 받았으나 국민연금에서 계약직으로 일하며 느꼈던 '비정규직의 현실'과 맞닥뜨렸고 그 기억으로 정중히 사양했는데 이번엔 아빠 차례였다.

 
혼자서만 오해했던 게 그분은 단지 계약직 자리에 응시를 해보라는 말씀이었을지도 모르는데 나를 뽑아 준다는 보장도 없는데 맵디매운 김칫국물만 무한 리필해서 들이켜고 있었으니 이제 와서 생각해 보면 얼마나 어이없는 착각이었는지 모른다.

나의 친척뿐만 아니라 다른 과장님들도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는 친인척들에게 다 제안했을지 누가 알아?

 
비정규직의 설움만큼이나 가족과 같이 일하는 고충 또한 가볍게 넘길 일이 아니었으므로 한 번 더 정중히 사양을 해야 했다.

옛날에는 호랑이, 마마, 불법 비디오테이프가 가장 무서웠다고 하지만 갈 시집도 없는 다 큰 딸에게 부모님과 같이 일하고 살자는 그 말이 더 무서웠다.

아빠마저도 나를 끝까지 못 믿었던가? 
(내가 아빠였더라도 불량한 수험생활을 해온 딸을 불신할 수밖에.)

희망이 안 보였을까나? 
(한결같은 불합격이라는 짙은 안개에 가려 희망이라곤 모래알 하나만 하게도 안보였겠지.)

 
그 말씀에 난 조금 충격을 받았고, 느닷없이 서러움을 느꼈으며 기분이 지하 100층 정도까지 초고속으로 가라앉았다. 그러면서  나도 모르게 흐르던 눈물방울, 눈물방울, 수험서가 얼룩졌다.
보통은 
"그쯤 하고 시집이나 가라"
라는 말을 많이들 듣는다고 하던데.
부모님께 저런 해괴망측한 말을 듣지 않게 해 주려고 그는 나를 자유롭게 해주었나 보다.

다시 한번 고마운 사람이다.

 
여기서 '시집이나'라는 말은, 별 재주 없고 남의 밑에서 일하기 싫고 아등바등 사는 게 지겹고 남의 눈에는 만만해 보여서 '시골 가서 농사나 지을까'라는 말처럼 무책임하고 아픈 말이다. 
투명인간 신랑감이라도 시집을 가려면 일단 상대방이 있어야 하는 거고, 그렇다고 결혼은 상대만 있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니지 않은가.
아주 조금 경험해 봤지만 농사짓는 일은 정말 아무나 하는 게 아니란 걸 일찌감치 터득했다. 
정말 마음대로 안 되는 게 농사가 아니던가. 우주 삼라만상이 도와줘야 하는 것이다. 하다못해 어느 정도 농사 기본도 있어야지 무턱대고 땅만 파고 물만 뿌린다고 수확이 나는 건 아니더란 말이지.
 
최근에도 누군가가(한 집에 동거 중인 40세 남성으로 '다른 집 여자들은 뭐든지 다 잘한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사는, 내 편이 아닌 것만은 확실한 그 한 사람이라고 절대 밝힐 수 없다.) 그랬다.
"나중에 퇴직하면 농사나 지어야지." 
이에

"농사짓기가 어디 그렇게 말처럼 쉬운 줄 알아? 그거 정말 아무나 하는 거 아니야. 어디 거실에서 농사지을 거야? 결정적으로 손바닥만 한 땅도 가진 게 없잖아."
라고 대꾸했던 기억이 난다.
 
아무 생각 없이 내뱉는 '~이나/나' 이 말은 굉장히 위험하다. 알고 보면 가장 폭력적인 말이기도 한데 별 뜻도, 아무런 생각도 없이 저런 말을 남발하는 사람을 보면 이젠 할 말을 잃게 된다.
어쨌든 서른에는 뭔가 끝장을 내야겠다는 마음으로 겁도 없이 일반행정직을 "딱 1명"만 뽑는 지역에 원서를 쓰고야 말았다.

현실적으로 오랜 기간의 수험생활을 끝내는 게 더 낫지 내 인생을 끝내버릴 수는 없는 일이었으니까.

고단했던 20대를 보내며 무식해서 용감했던 그때의 나, 조금은 '될 대로 돼라.'이런 마음에 일단 저지르고 봤다.
미친 척하고 붙으면 붙고 떨어지면 말고...... 
진짜 미쳤었나 봐.
장기간의 수험생활로 사리분별능력이 굉장히 떨어졌을 때다.
 
30년 가까이 산 고향이 마냥 좋아서, 그나마 타 지역 사람보다는 조금이라도 더 알고 있다고 믿고 다른 지역에서 일한다는 건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는 시골 사람은 단순히 고향에서 일하고 싶다는 염불에만 온통 생각이 미쳤지, 잿밥에는 전혀 관심 없었습니다.
고향을 사랑하는 마음이 가장 컸다.

고향을 내가 더 많이 사랑한 죄, 내게 죄가 있다면 그뿐이다.

 
절대 불가능한 일이지만 다시 그 시절로 돌아간다면 절대 절대로 그런 무모한 짓은 하지 않으리.
그럴 만한 이유가 충분히 있었으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