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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하지) 않(은) 남매

아빠가 바쁘면? 외삼촌이 있다!!!

by 그래도 나는 2023. 8.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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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 우리 물놀이 갈 건데 내가 애들 데리고 갈까?"
갑자기 친정에 들이닥친 동생이 아주 귀가 솔짓해지는 제안을 했다.
아무렴, 물놀이장도 데리고 가도 좋고, 아예 너희 집으로 데리고 가서 전입신고 하고 살아도 좋아.
불쾌지수 확 떨어지는 동생의 말에 나는 한줄기 찬란한 구원의 빛을 보았다.
 
"엄마, 우리 방학인데 아무 데도 안 가? 워터파크라든지 어디 놀만한 데 말이야. "
방학 첫날부터 딸은 워터파크 타령을 시작했다.
"날이 이렇게 더운데?(=난 나갈 기운도 없다.= 나가면 고생만 해.= 집이 최고지.=힘들게 뭐 하러 나가려고 그래? 요즘 세상이 얼마나 흉흉한데?)"
"더우니까 시원한 데 가서 놀면 좋잖아."
물론 가서 노는 건 좋다.
하지만 집에서 그 시원한 그곳에 도착하기까지의 험난한 여정을 생각하면 그  생각만으로도 난 아찔하다.
"우리 그냥 맛있는 거 먹으면서 집에서 편하게 놀고먹으면 안 될까? 엄마가 너희 먹고 싶다는 거 많이 만들어 줄게."
어리석은 중생은 가끔 뭐가 더 편하고 더 힘든 것인 줄 판단착오를 일으킬 때가 있다.
하루라도 눈 한번 질끈 감고 아이들이 원하는 대로 집을 탈출할 것인가, 아니면 어딜 것들의 식탐을 교묘하게 이용해서 온갖 감언이설과 아직 확정되지도 않은 메뉴들로 일단 그들의 환심을 산 다음 정적한 선에서 합의를 볼 것인가.
여행이라도 다녀오면 그걸 빌미로 며칠 몸져누워있으면서 심신 안정을 취할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물론 나의 두 번뇌들이 나를 가만두지 않을 것이 뻔하지만) 부실한 체력을 핑계 삼아 방학 내내 집에서 꼼짝 않고 허구한 말 음식 대령만 해 내는 일도 보통은 아닐 것이다.
게다가 하필 남편이 아주 바쁜 한때를 보내는 중이다.
어찌나 일이 많은지 옆에서 보기 안쓰러울 정도다.
양심도 없이 피곤한 가장에게 이 삼복더위에 바깥바람 쐬자고 무작정 닦달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근데, 아빠가 요즘 너무 바쁘고 피곤하잖아. 어떡하지?"
그러던 중에 동생에게서 전화가 온 것이다.
 
"외삼촌이 너희 물놀이장 데리고 간다는데 갈래?"
내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아이들은 짐을 꾸렸다.
아이들만 보내놓고 솔직히 하루 종일 혼자 있고도 싶었으나, 양심상 나도 덩달아 짐을 꾸릴 수밖에 없었다.
좀처럼 쟁취하기 힘든 외삼촌 찬스를 놓칠 수 없어 아이들은 그날로 예약됐던 치과 검진도 다음 주로 미뤘다.
 
아들만 하나뿐인 동생네, 그리고 나중엔 딸만 하나뿐인 둘째 오빠네도 합류했다.
평소에 야박하게 굴었던 아이들에게 컵라면이며 과자, 음료수 같은 간식들을 바리바리 싸간 날 보며 남매는 의아해했다.
"엄마가 웬일이야? 이런 날도 다 있네?"
라며 천국의 문을 연 모습을 보였다.
"이런 날도 있어야지. 이왕 놀러 왔으니까 신나게 놀고 가."
나는 언제 당근을 주고 언제 채찍을 들어야 하는지 잘 아는 사람이다.(라고 착각을 하고 산다.)
"엄마, 너무 기대돼서 잠이 안 와. 이러다가 내일 늦잠 자버리면 어떡하지?"
전날 밤에 아들은 들뜬 마음에 별 걱정을 다했다.
"내일 7시에 출발할 거야. 그러니까 일찍 자야지. 6시 반에 깨울 테니까 그때 못 일어나면 못 가는 거야."
주위 도움 없이 나 혼자라면 두 아이를 데리고 이 땡볕에 물놀이장은 꿈도 못 꿨을 것이다.불
아이들은 신났지만, 솔직히 나는 너무너무 힘들었다. 일사병 내지는 열사병 비슷한 것이 틀림없다고 의심되는 증상에 하루 종일 머리가 지끈거리며 맥을 추지 못했다.
도착하자마자 지쳐서 나는 하루를 보낼 일이 심란했다.
오만가지 준비물을 바리바리 싸서 혼자 챙겨 오느라 진이 다 빠져버린 것이다.
하지만 저렇게 아이들이 즐거워하니 구급차를 부르는 한이 있더라도 마지막까지 남아야지, 하는 마음으로 버텼다. 
그러면서도 집에 운전하고 갈 일이 까마득했다.
"너흰 괜찮아? 엄만 머리가 너무 아프고 기운이 빠지는데."
"우린 멀쩡한데? 엄만 왜 그래?"
왜 그러긴, 이 불볕더위에 텐트에서 짐 지키고 (물론 내가 자처한 일이지만) 보초 서느라 그러지.
"그러면 먼저 집에 가. 내가 애들 데리고 갈게."
동생이 선심 쓰듯 말했지만 내 자식은 내가 끝까지 책임져야 한다는 생각으로 끝까지 엉덩이를 떼지 않았다.
여자는 약하다.
그러나 (어떤) 어머니는 더 약하다.
강한 것은 어머니가 아니라 한여름의 무더위였다, 내게는, 적어도 그날만큼은.
 
아이들이 어찌나 신나게 노는지 데리고 오길 정말 잘했다는 생각을 수 십 번도 더 했다.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
아빠가 바쁘면 외삼촌이!
3남 1녀을 두신 친정 엄마도 자식을 넷이나 낳은 보람을 느끼실지도(물론 한 멤버의 가족이 불참했지만) 모르겠다고까지 느닷없이 생각했다.
아쉬워하는 아이들을 재촉해 집에 돌아갈 짐을 꾸리며 이제 고난의 가시밭길은 끝났다고 생각하던 찰나였다.
지쳐 쓰러지기 일보직전까지 하루 종일 실컷 물놀이를 한 아이들은 내게 청천벽력 같은 소리를 한마디 했다.
"엄마. 우리 내일 또 오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