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합격아, 너 방학 때 엄마한테 요리해 줄 거라며? 언제 해 줄 거야?"
"어? 글쎄, 언제 할까?"
"오래간만에 장아찌나 만들어 볼까?"
"무슨 장아찌?"
"새송이 버섯 장아찌 어때? 진짜 간단해."
"버섯으로도 장아찌를 만들어?"
"옛날에 엄마가 만들었었잖아. 오랜만에 해 보자. 그건 아주 쉬워서 너도 만들 수 있어. 다른 친구들도 다 한 번쯤은 만들어 봤을걸?"
밑도 끝도 없이 아무 말 대잔치를 하며 딸을 유혹했다.
자고로 방학중인 초등생들은 에어컨 아래서 마냥 놀려서는 안 된다는 우리 조상님들의 말씀을 받들어 이번엔 장아찌를 같이 만들어 보기로 했다.
노는 것도 좋지만 가사 일도 해야만 한다, 엄마를 돕는다기보다 '같이' 말이다.
버섯 장아찌를 한 오백 년 전에 만들고 한동안 손을 놨었다.
한창 음식을 만들고 싶은 욕구가 불끈 솟아 재료를 가리지 않고 장아찌와 각종 청을 만들어 내던 젊은 시절이 내게도 있었다 물론. 지금도 젊지 않다고는 할 수 없는데, 아니 젊은것은 아니라고 해야 하나, 어쨌거나 더 기운도 있고 의욕도 있고, 식욕도 있었던 시절 말이다.
지금은 일단 식욕이 없고, 음식을 만들고자 하는 의욕은 더욱 없으며, 관심조차 꺼져가는 중이다.
"버섯 써는 건 정말 쉬워. 엄마가 써는 크기 정도로 썰기만 하면 돼. 그리고 그릇에 담아. 그럼 끝이야."
"뭐야, 장아찌 만드는 게 이렇게 간단한 거였어?"
"하나도 안 어렵다고 했잖아. 넌 처음이니까 엄마랑 같이 해야지. 장아찌 국물은 엄마가 만들 테니까 일단 재료 손질만 네가 해 줘. 간장이랑 설탕, 소금 비율을 맞춰야 하니까 옆에서 좀 거들어 주고 맛 좀 봐줘."
아이튜브에 수많은 사람들이 장아찌 국물의 황금 비율을 알려줬지만 나는 그냥 계속 맛을 봐 가면서 조절한다.
한때는 계량 눈금을 읽어가며 조절하던 시절도 없지 않았으나, 지긋지긋한 형식주의에 넌덜머리가 난 나는 이제 요리란 내게 부담 없어야 한다는 마음이다.(그리하여 지금에 와서 맛도 없기도 한다, 가끔.)
내 입맛에 괜찮으면 그냥 맛있는 거다.
그러니까, 그 말은 곧 맛이 일정하지 않다는 것이다.
아주 치명적인 단점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입에 맛있으면 그만이니까 과감히 질끈 눈감기로 한다.
음식 만들기라고 해서 거창하게 지지고 볶고 장식해 내는 그런 것을 할 의향은 전혀 없었다.
처음부터 어렵다고 생각되면 다음 기회는 없는 거다.
그런데, 어째 우리 두 여자만 하기엔 뭔가 억울하다.
"우리 아들은 뭐 하고 있는고? 엄마랑 같이 장아찌 만들어 볼 생각 없어? 너도 할 줄 알아야지. 그래야 나중에 혼자 살면 만들어 먹지."
느닷없이 나는 곧잘, 아이들이 1인 가구로 살아갈지도 모른다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밥은 먹고살아야 하니까 일단 초등생 수준에 맞는 간단한 반찬 만드는 법을 전수하기로 한다.
"무슨 장아찌 만들 건데?"
"새송이 버섯 장아찌야."
"뭐야? 엄마, 난 버섯은 별로야. 나는 빼줘."
열 살 어린이는 단호하게 망설임도 전혀 없는 고자세로 단번에 요리 참여 거부 의사를 밝히셨다.
이런!
아들이 특별히 다른 음식은 안 가리지만 버섯을 그리 좋아하지 않는 편이라는 것을 간과한 재료 선정이었다.
"그래? 그럼 넌 다음에 레몬청 만들 때 엄마랑 같이 만들자. 우리 집에서 네가 제일 잘 먹고 많이 먹잖아."
"알았어. 그거야 나도 좋지."
역시 열 살에게는 맞춤형 재료 선정이 필요하다.
어려운 일도 아니고 약간의 의지만 있다면 (내 생각에만) 아이들이 엄마와 함께 할 수 있는 가사가 정말 많다.
나는 최대한 아이들에게 많은 것을 알려주고 싶다.
"얘들아, 항상 엄마가 있어도 없다고 생각해."
이런 말을 할 때마다 아이들을 반발하곤 한다.
"엄마, 어떻게 엄마가 있는데 없다고 생각해?"
"엄마가 평생 살아 있을 수는 없는 일이잖아. 그러니까 미리미리 너희 스스로 많은 일들을 해 보라는 의미야."
어쩌면, 아이들에게 이 모든 것을 야금야금 다 떠넘겨버리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다는 것을, 아이들이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만, 간헐적으로, 계획적으로, 꾸준하게, 다만 나는 끝까지 밀어붙이면 된다.
결정적으로 경험해 보지 않고서는 절대 모르는 그 오만가지들에 대하여, 나는 그저 경험을 선물하고 싶을 뿐이다.
아이들이 그 선물을 기꺼이 받겠다고 수락하지는 않았지만, 물론.
"엄마, 장아찌 만들기 진짜 쉽다. 너무 쉬운 거 아냐?"
솔직히 정말 '별 것도 아닌' 장아찌를 처음 만들어 본 딸은 자신감이 수미산만큼이나 높이 치솟았다.
"정말 그렇지? 그런 의미에서 다음번엔 너희가 좋아하는 도토리 묵이야! 작년에도 해 봤으니까 이번에도 잘할 수 있겠지?"
무탈하게 여름 방학을 보내는 방법, 혹은 엄마의 잔머리,
우리 집은 대체로 이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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