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엄마, 오늘 점심 메뉴는 뭐야?"
"있는 반찬에 호박전이랑 버섯 전이랑 나물이랑 그런 거야."
"엄마, 낮에 뭐 맛있는 거 해 줄 거야?"
"너희 떡국 좋아하니까 간단히 떡국 끓여 볼까 하는데."
"엄마, 오늘은 닭고기가 먹고 싶은데 해 줄 거야?"
"그럼 엄마가 두 마리 구워 줄게. 하나는 후라이드, 하나는 양념, 어때?"
"엄마, 나 입맛이 별로 없는데 뭐 맛있는 거 없을까?"
"그래? 그럼 국수 해 줄까, 야채 많이 넣고?"
"엄마, 나 고구마튀김이 먹고 싶은데."
"그래? 그럼 이왕 튀기는 거 버섯이랑 단호박이랑 가지도 튀기자. 오징어 튀김도 하고. 튀김은 해 먹기 쉽지 않으니까 있는 걸로 다 튀겨 버리자. 오늘 한 번 튀김 원 없이 먹어봐라, 너희들."
"엄마, 오랜만에 닭죽 먹어 볼까?"
"너희가 먹고 싶다면 엄마가 만들어 줘야지. 녹두 많이 넣은 거 좋아하지? 엄마가 해 줄게."
"엄마, 엄마도 힘드니까 오늘은 간단히 먹자."
"그래? 그럼 있는 거 다 넣어서 비빔밥 해 먹자."
옛날옛날에는 호한, 마마, 호랑이, 불법 비디오테이프가 가장 무서웠다고 하지만 2023년을 사는 나에겐 지금 방학이라 하루 종일 내 옆에서, 그것도 매일 '점심메뉴'가 무엇인지를 묻는 남매의 말이 가장 무섭다.
"아가씨네 애들은 메뉴가 뭐냐고 안 물어봐? 우리 애들은 날마다 물어봐."
"우리 애들은 주는 대로 잘 먹어. 그런 얘기 전혀 안 하던데?"
"아유, 좋겠다. 애들이 아무 거나 잘 먹어서. 우리 애들은 입맛이 얼마나 까다로운지 몰라. 같은 메뉴 연속 두 번은 안 먹어. 정말 피곤해."
"응. 우리 애들은 반찬 투정도 안 해. 같은 음식 몇 번 줘도 그냥 잘만 먹던데?"
입이 방정이었지.
저런 말을 첫째 새언니와 주고받은 지 반년도 채 안돼 나는 그때 내 그 발언이 경솔했었다는 걸 깨달았다.
"엄마, 배고픈데 오늘은 뭐 먹을 거야?"
언제 배고프지 않은 적이 있었던가 싶게 요즘 아들은 거의 하루 종일 먹고 계시다.
"깻잎 넣고 동그랑땡 하려고 하는데, 괜찮지?(=너희가 안 괜찮으면 어쩔 거야 또? = 주는 대로 잡수시라."
"나 깻잎 넣을 거 좋아하는데."
딸도 특별히 가리는 음식이 없이 잘 먹기 때문에 오늘 나의 점심 메뉴 선정에 반색했다.
"뭐 그것도 괜찮지."
아들은 '그래 내가 한 번 먹어준다.'이런 마음인 건가?
아니면 자신의 기대치에 좀 못 미쳤다는 뜻일까?
"얘들아, 오늘은 간단히 먹자. 날마다 음식 하기 얼마나 힘든지 너희도 잘 알지?"
이 엄마가 매번 다른 음식을 장만해 내는 일에 얼마나 고충이 많은지 아이들에게 종종 말하곤 한다.
"그래 엄마. 엄마 힘들면 안 해도 돼. 그냥 쉬어요."
물론 남매는 이렇게 곧잘 말한다.
하지만 내가 쉬면 너희는 뭘 먹을 건데?
누가 먹일 건데?
그래도 말이라도 고맙구나.
"엄마, 또 추어탕이야? 난 다른 거 먹으면 안 돼?"
하지만 같은 메뉴가 두 번 밥상에 오르면 가장 불만이 많은 어린이들이 바로 그 두 어린이들이다.
"어? 한 번 더 먹는 거야? 아침에도 먹었는데..."
라며 그에 못지않게 반찬투정인 듯, 아닌 듯, 반찬투정 같은 말씀을 하시는 이는 다름 아닌 남편이다 물론.
다 된 음식 그냥 먹기만 하는 건데도 그게 그렇게 어려운 일인가, 단지 한 번 더 같은 음식을 먹는다는 일이?
이 폭염에도 매 끼니마다 가족에게 뭘 먹여야 하나 심란하기까지 한 나도 별 말 안 하는데 말이다.
지난번에 미꾸라지가 협찬 들어와서 오랜만에 추어탕을 만들어 먹었다.
나야 물론 추어탕을 좋아하는 사람이니까 여러 번 먹어도 상관없을 일이고 그러면 나도 편하지만 나머지 세 멤버는 그게 아닌가 보았다.
아이들이 방학을 해서 하루 종일 집안에만 있다 보니 세 번의 끼니와 중간에 주는 간식을 챙겨주는 일이 그렇게 머리 무거울 수가 없다.
제발 다음 끼니의 메뉴가 뭐냐고 묻지만 않아줘도 숨통이 트일 것 같다.
"얘들아, 그냥 엄마가 주는 대로 먹자. 그만 좀 물어볼래?"
급기야 나도 질문 원천봉쇄를 시도했다.
"아니, 엄마. 물어보지도 못해?"
열 살짜리 아들이 발끈하고 나섰다.
"그게 아니라. 물어볼 수는 있는데 안 그래도 엄마는 항상 무슨 반찬을 해서 줘야 하나 고민인데 자꾸 너희가 물어보면 더 신경이 쓰이니까 그렇지.(=제발 물어보지 마라 좀.)"
"엄마는 참."
아들이 못할 소리를 한 것은 아니다.
그 나이면 먹고 싶은 것도 많고 해 달라고 요구하고 싶은 음식도 많을 것이다.
이해는 하지만 음식을 만들어 내는 일이 종종 나도 힘에 부친다.
"그 알약 아직도 소식 없어?"
애먼 남편만 닦달한다.
어딘가에 있을 것만 같은데, 다들 쉬쉬하고 자기들끼리만 편하게 먹고사는 거 아니야?
그 누구보다도 나는 그 알약이 간절하다.
"엄마, 근데 내일 점심은 뭐야?"
세상에는 믿기 힘들지만,
설마설마했는데,
들을 때마다 뜨악해지지만,
매일 그날 점심 메뉴가 무엇인지 엄마에게 묻고 또 묻는 남매가 세상에 존재한다고 한다.
엄마는 그냥 하루살이로 살고 싶다.
하루만 살고 싶다.
단지 그날그날 당일치기로 점심 한 끼씩만 해내고 싶다.
그래도 다행이다,
20일만 있으면 개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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