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거 내가 당신 주려고 샀어."
출장을 다녀온 직장인이 호들갑스럽게 무직자에게 말했다.
"난 안 가질 거야."
쳐다보지도 않고 무직자는 대답했다.
"그러지 말고 한 번 봐봐. 응?"
"보기도 싫어. 안 봐도 뻔해."
"이 사람이 사 온 사람 성의를 생각해서라도 보는 시늉이라도 할 것이지."
"안 보고 안 가질 거라니까!"
도대체 뭘 이바지로 들고 오셨는지는 모르겠으나 안 봐도 맘에 안 든다.
과거에도 마음에 안 들었고(과거)
지금까지 쭉 맘에 안 들어왔으며(과거완료).
앞으로도 마음에 안 들 예정이다.(미래)
"엄마. 그러지 말고 한번 보기나 해 봐. 내가 보기엔 괜찮은데?"
보다 못한 딸이 직장인 구제에 나섰다.
가만 보면 딸과 아빠는 취향이 비슷한 것 같았다.
딸 눈엔 예뻐 보였을지 모르지만 난 전혀 아니다.
그리고 부탁한 적도 없는데 아무거나 들고 와서 선심 쓰듯 무조건 고마워하며 받아야 한다는 식으로 내미는 그런 행동이 유쾌하지도 않다.
준다고 다 선물인가?
성의라니?
진심으로 나를 주기 위해서 심혈을 기울여서 내 기호를 생각해서 산 것이 절대 아니란 걸 잘 알기 때문에 더 탐탁지 않다. 그리고 난 그런 것을 바란 적도 없다. 괜히 본인 기분에 사가지고 저렇게 나오는 것도 하나도 달갑지 않다. 왜 본인 기분만 생각하는지, 상대가 받을지 안 받을지도 생각 않고 주면 무조건 고마워하겠거니 그렇게 생각하는 그 마음 또한 이해되지 않는 것이다. 선물 같은 거 안 줘도 되니까, 달라고도 안 하니까 제발 한 번씩 엉뚱한 소리나 하지 마시라.
"내가 자기 주려고 샀는데 한 번 입어보기나 해 봐."
나는 안다, 정말 나 입으라고 산 것은 아니라는 것을.
그래서 단칼에 거절했던 것이다.
그 직장인은 그런 전과가 좀 있는 편이다.
무직자는 어차피 출근할 직장도 없었으므로 굳이 맘에도 안들 예정인 그것을 받을 필요도 없었고 받고 싶지도 않았다.
무직자에게도 감이란 게 있다.
직장인은 분명히 안 봐도 뻔하게 '분위기에 휩쓸려' 그 천덕꾸러기를 구매했을 것이다.
누구를 위해서가 절대 아니다.
그런 식으로 12년 동안 그 직장인은 얼마나 많은 (굳이 필요하지도 않고, 있어도 그만, 없으면 더 그만인) 물건들을 사들이셨던가.
처음 그 물체가 비닐봉지 안에서 탈출해 거실에 버젓이 그 형체를 드러냈을 때부터 나는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이다. 직원들과 함께 별생각 없이 '그냥' 집어 들었을 것이다.
나는 저런 색을 좋아하지 않는다.
꿈에서라도, 아무리 떨이 상품이라도 살 의향이 없는 그런 색이었다.
사람마다 취향이란 게 있지 않은가 말이다.
이왕 내 것이 될 운명이었다면 나는 차라리 흰색, 검은색이 좋았다.
내가 좋아하는 색은 따로 있지만 그런 걸 알 턱이 없는 결혼 12년 차의 직장인은 무직자의 색상 선호도 따위 안중에도 없었을 것이다.
정말 성의란 게 뭔지 아는 사람이라면 적어도 사이즈를 비슷하게 사든지, 좋아하는 색이라도 비슷하게 알고 있어야 하지 않을까, 혼자만 생각한다.
아마도, 충동구매와 원플러스 원인' 충동 성의'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다른 직원이 이걸 사더라고. 그래서 나도 하나 샀지."
드디어 이실직고를 하셨다.
그러니까 그 옷은 단지 남의 아내의 취향일 뿐, 본인의 아내의 취향과는 전혀 무관했던 거다.
내 그럴 줄 기원전 3만 년 경에 이미 알고 있었느니라.
몇 년 전에도 제주도 워크숍을 갔다가 다른 여직원들이 립스틱을 사니 덩달아 하나 덜컥 집어 들고 온 그 남자가 바로 그 직장인이시다.
쓰지도 않을 거면 쓸모가 없어지고 결국 뭐가 될까?
그런 식의 씀씀이가 정말 이해되지 않는다.
차라리 그만큼의 과자를 사줬으면 기쁘고 고맙게 난 받아들였을 것이다.
"진짜 가정적이야. 부인 선물도 다 사가고."
옆에서 호들갑 떠는 직원들의 별 의미 없는 말에 혼자만 기분 좋았겠지.
어쩌면 그런 말을 듣고 싶어서?
사실은 이렇다.
"진짜 충동적이야. 부인이 쓰지도 않을 색상의 립스틱도 다 사고."
이게 진실인 것이다.
"난 이 색이 진짜 안 어울려서 절대 이런 색은 안 사."
라고 결혼 생활 내내 얘기했었는데, 용케도 절대 사지 말았어야 할 바로 그 색을 'get' 해 버린 능력자.
옆에서 누가 사면 덩달아 사버리는 남자, 아내를 위해서라고는 했지만 아내 몸집의 두 배는 될 법한 사이즈(어쩌면 나와 두 아이들이 한꺼번에 들어가고도 남을 사이즈)로 과감히 구매하는 그 남자, 철저히 남의 안목에 지배당해 색상이라도 다른 걸로 고르는 성가신 일 따위는 결코 수고스럽게 하지 않는 그 남자, 나의 기쁨, 나의 고통, 나의 충동 구매자.
진심으로 나를 생각해서 산 거라면 색상은 그렇다 치더라도 사이즈는 얼추 내게 맞게 골랐어야 하는 거 아닌가.
솔직히 결혼한 지 10년도 넘었으면 옆집 남의 아내 옷 사이즈도 눈대중으로라도 대충 알아맞힐 세월이 아닌가? 내가 어딜 봐서 100 사이즈냐고.
"그냥 넉넉하게 입으면 되지 않아? 괜찮을 것 같은데?"
아니, 전혀 괜찮지가 않아, 괜찮지 않을 예정이야, 앞으로도 평생...
일단 충동구매부터 해 놓고 아내에게 아무 말 대잔치를 하며 무조건 들이미는 남자, 이렇게나 애처가스러울 수가!
"하여튼, 사 주는 것마다 다 맘에 안 든다고 하니..."
직장인의 볼멘소리가 이어졌다.
"하필이면 맘에 안들 예정인 것들로만 사 오는 거지."
무직자가 공짜 선물을 거부해도 할 말은 있다고 했다.
남들에게는 없는 그 직장인에게만 있는 백만 불짜리 재주다.
이렇게 시도 때도 없이 나에게만 재능 기부를 해 버리시면 어쩐담?
잠깐, 그러고 보니 이거 이거 옛날여자 친구 스타일 아냐, 이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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