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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하지) 않(은) 남매

뒤끝없는 아들에게 있는 것

by 그래도 나는 2024. 3.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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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이건 좀 아니잖아."
"왜? 별로야?"
"내가 이렇게 하지 말라니까."
"마음에 안 들어?"
"엄마, 내가 그렇게 말했는데, 응?"
"어떡하지? 이미 다 지난 일인데."
"엄마, 내가 계속 부탁했잖아."
"근데, 그게 엄마 마음대로 되는 게 아니야."
"이렇게 해버리면 어떡해?"
"미안해. 다음에는 더 조심할게."
 
걸려들었다, 아들의 올가미에.
내게 죄가 있다면 단 하나, 아들이 요구한 헤어 스타일대로 완성해 내지 못한 죄, 그것뿐이다.
어차피 그건 나이롱 이발사에겐 불가능한 요구였다.(는 것을 아드님은 알기나 할까?)
 
아들이 점점 나를 피하려고 했다.
"우리 아들도 이발할 때가 됐는데."
"엄마, 난 머리 안 길었어. 아직 멀었어."
"아니야. 네가 뒷모습을 못 봐서 그래. 뒤에 좀 지저분해졌어."
"아니, 난 괜찮아. 더 있다가 할게."
"그냥 엄마가 하자고 할 때 하면 좋겠는데."
"엄마, 일주일 뒤에 합시다. 됐지?"
"안 됐는데, 뒷머리가 많이 길었는데."
"일주일 더 있다가 한다고 해도 큰일 안나. 안 그래?"
"그래. 큰일은 안 나지만 작은 일은 날 것 같다."
"그냥 엄마가 자르고 싶어서 그런 거잖아. 그치?"
"엄마가 보기엔 자를 때가 됐어. 3주나 지났어."
"에이, 괜찮다니까."
"그러지 말고 이번에 자르자. 응?"
"엄마를 못 믿겠어. 저번에도 조금만 자른다고 해 놓고 많이 잘라버렸잖아."
"그게 하다 보면 그렇게 된단 말이야. 이번엔 진짜 조금만 자를게. 앞머리는 손도 안 댈게.(=가위만 댈게)"
"알았어. 그럼 한번 믿어보지. 에휴"
"근데 우리 아들 그 한숨은 뭐지?"
그렇게 어렵사리 협상에 성공해서 아들 이발을 해줬을 때다.
하면서도, 내가 나를 못 믿고, 내 실력은 더 못 믿고, 아슬아슬하게 아찔하게 가위질을 했다.
"엄마. 잘 되고 있는 거지?"
"그럼. 당연하지."
"어째 좀 불안한데."
"불안하긴 뭐가 불안해? 걱정하지 마."
"믿어도 되는 거야?"
"우리 아들은 엄마를 안 믿으면 누구를 믿을 거야, 그럼?"
"에휴, 알았어. 아무튼 제발 잘 좀 해봐요."
"걱정 말라니까 그러네."
그러니까 아들에겐 예지능력이 있는 것 같다. 어쩜 내가 사고 칠 줄 알고(?) 그렇게 자꾸 불안해 한 거람?
나도 잘해보고 싶었다.
하지만 마음 따로 손 따로, 특히나 가위는 더욱 따로다.
참 미스터리하게도 할수록 실력이 느는 게 아니라 갈수록 더 못하는 것도 같은 이 느낌적인 확신이라니!
권태기가 온 건가? 이발 권태기?
아니, 양심상 권태기를 느낄 정도의 실력도 못된다는 걸 고백하는 바이다.
단지 아들이 점점 불만이 많아진 것인가 아니면 내 이발 실력이 점점 형편없어지는 것인가?
나는 전자라고 믿고 싶고 아들은 후자라고 믿고 싶어 한다.
"엄마, 아직 멀었어? 오늘따라 왜 이렇게 오래 걸려?"
"거의 다 됐어.(=아직 멀었어)"
"오래 걸리니까 더 불안한데? 제대로 하고 있는 거 맞아?"
"그럼!(=사고 친 거 뒷수습 제대로 하고 있는 거 맞지 그럼)"
하긴 언제 한 번이라도 내가 흡족하고 아들도 흡족했던 적이 있기나 했던가.
 
"엄마, 이게 뭐야? 왜 이렇게 잘랐어?"
"왜?"
"내가 이렇게 하지 말라니까."
"별로야?"
"어휴, 진짜."
"엄만 우리 아들 잘생기기만 했는데 왜 그래?"
"엄마!"
"지금은 막 잘라서 그래. 이제 이발해서 어색하게 보여서 그럴 수 있어. 시간 지나면 괜찮아질 거야. 익숙해지면."
"아닐 것 같은데. 진짜 왜 이렇게 한 거야?"
"일단 시간 지나면 너도 마음에 들 거야."
"진짜, 어휴."
"그리고 머리가 이상해도 우리 아들은 잘 생겼으니까 다 괜찮다니까."
애써 뒷수습을 최대한 아름답게 포장하려고 했지만 이제 4학년씩이나 된 아들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변명 아닌 해명도 아닌, 무조건 상대 말에 이리 피하고 저리 피하면서 위기를 모면하려고 발버둥 쳤다.
이런 걸 고급전문용어로 '둘러댄다'라고 한다지 아마.
솔직히 나도 썩 만족스러운 건 아니었다.
하지만 나까지 동요되어선 아니 된다.
시간이 해결해 줄 것이다.
다랭이 마을처럼 무슨 계단식 논도 아닌 것이 제3세계 조각품도 아닌 것이 좌우 대칭이 살짝 안 맞고 너무 티 나게 층이 난 것도 같고 아무튼 실력 발휘를 못했다고 나도 인정하는 바이다. 과연 내게 실력이라고 일컬을 만한 무엇이 있는지도 의문이긴 하다.
 
"엄마. 진짜."
"엄마, 내 머리를 왜 이렇게 한 거야?"
"어휴."
"머리가 정말."
"시간이 지나도 그대로잖아."
"도대체 엄만 왜 내 말대로 안 한 거야?
"엄마도 생각해 봐."
"엄마가 나라면 어떻겠어?"
"내가 해 달란 대로 해준다고 해놓고 이럴 수 있어?"
"엄마는 너무 내 말을 안 들어.
 
그날의 이발 이후로 아들은 틈만 나면 거울을 들여다보며 내게 은근히 집요하게 자꾸 그 일을 걸고넘어졌다.
나도 하도 많이 들어서 귀가 닳아 없어질 지경이었다. 무뎌지기 시작했다. 이런 걸 고급 전문용어로 '학습된 무기력'이라고 한다지 아마?
우리 아들 뒤끝 없다고 좋아했는데, 우리 아들은 뭐든 안 좋은 일은 마음에 오래 안 담아둔다고 대견해했는데, 그랬는데, 그랬는데, 한오백년 전엔 그랬는데.
뒤끝 없다고 호들갑 떨며 확신까지 주었는데 이제 와서 '너 정말 뒤끝 장난 아니다'라고 말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게다가 하루에 백만 스물 세 번밖에 말 안했으니까.
이제 보니 우리 아들, 앞끝 있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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