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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자 씨, 제가 임자 씨를 직접 만나보고 싶어요. 가능하면 빨리요. 이제 더 볼 시험도 없잖아요."
알았어, 알았어. 뭔 말인지 알겠지만 그건 니 생각이고.
더 봐야 할 공무원 시험은 없었지만, 정말 생각만 해도 욕지기가 올라올 만큼 나의 전부 쏟아부었다고 생각하고 지방직 시험까지 끝냈지만 수험생이기 이전에 나는 농부의 딸이다.
'제비'일지도 모르는 그에게서 자꾸 쪽지가 날아오는 동안 우리 집은 한창 농번기에 접어들었다.
농번기에 알지도 못하는 외간 남자랑 자꾸 쪽지 주고받는 자 모두 유죄!
2009년 초봄에 국가직 시험을 먼저 치르고 5월에 지방직을 치렀는데 예상했던 대로(게다가 브런치 구독자님들의 열화와 같은 성원에 힘입어) 국가직 시험은 깔끔하게 불합격(나의 구독자님들의 기도는 영험했다.)으로 마무리를 지었고 지방직 필기 합격자 발표까지는 한 달 정도 여유가 있었다.
그러나 백만에 하나라도 내가 지방직 필기 합격자가 될 수도 있었으므로 불린 몸을 원상 복귀하기엔 또 여유가 없었다.
영농 후계자까지는 아니어도 모범 경작생 수업을 착실히 받고 있던 백수에게 '구꿈사'에서 내가 지원했던 지역의 강력한 경쟁자라 여겼던 요주의 인물에게서 또 쪽지가 날아왔다.
그렇게도 할 일이 없나?
쪽지 그만 보내고 와서 농사일이나 거들라고 할까 보다.
우리 집에 필요한 건 일꾼이지 심심하면 쪽지나 발송해대는 한가한 외간 남자가 아니었다.
정말 몇 번을 우려먹는 사골인지 모르겠다.
한 소리 또 하고 또 한다.
본인은 국가직에 이미 합격했으니까(아무리 시험을 잘 봤다손 치더라도 어쩌면 저리도 일관성 있게 자랑질일까 싶게) 지방직은 바라지도 않는다며(그래, 바라지도 않는다면 그거 나한테 넘겨주라. 나한테 그 자리 넘기고 깔끔하게 쪽지도 그만 보내렴.) 여유까지 부리면서 굳이 묻지도 않은 얘기들(진심으로 나는 관심 0.1도 없는)을 주절주절 늘어놓으셨다.
지방직 시험을 막 끝낸 초반에는 딱히 할 일도 없고 가까이에 사는 친구들도 별로 없어서(혹은 다들 착실하게 직장생활을 하고 있었으므로 평일에 한가하게 백수를 상대해 줄 친구를 찾기 힘들었다.) 무료했던 차에 한두 번 답장을 해줬더니 내가 자기 펜팔이라도 되는 줄 착각한 거야 뭐야?
공시생 시절에도 코피 한 번 쏟지 않았던 내가, 그 쪽지에 답장하느라 백수가 과로사할 수는 없는 일이었으므로 적당히 대꾸하고 적당히 무시했고, 적당히 관심에서 멀어졌다.
그래도 고립된 생활에, 따분한 시골살이에, 뭔가 한 눈 팔 만한 사건은 됐던 것 같다.
그런데 아뿔싸!
난 여자고 넌 남자야!
처음엔 그가 남자인지 여자인지 그런 분별력도, 관심도 없었다.
그냥 팽수같은 존재일 뿐이었다.
(들은 얘기인데, 확실한지 모르겠지만 팽수는 성이 여도 남도 아니라고 했다.)
그는 내게 그저 나와 같은 지방직에 응시한 수험생일 뿐이었다.
쪽지를 주고받은 뒤 한참만에 그의 성별이 드러난 것이다.
수법에 말려든 것이란 말인가.
아니 스스로 악의 구렁텅이에 뛰어들었던가.
오랜 수험 생활로 몸과 마음이 피폐해진(다소 정상적인 사고가 어려웠던) 공시생 남녀는 어느새 때늦은 '접속'을 찍고 있었다.
그는 주로 고시원 생활을, 나는 시골에서의 하루 일과를 시시콜콜 주고받게 되었고, 어느덧 핸드폰 번호까지 오가게 되었다.
중간중간 '혹시 제비가 아닐까?', '신종 사기 수법인가?' 등등 별의별 생각이 들었던 것도 잠시 세상 물정 모르는 (내 생각에만) 순진한 서른 살 인생이 그가 던진 그물에 단단히 걸려들었다는 확신이 들었다.
제비도 사람 봐 가면서 작업을 걸어야지. 아무것도 가진 것 없는 백수에게 건질 게 뭐가 있다고?
하도 흉흉한 세상이다 보니 공시생을 가장해 공부만 해서 판단력이 흐려진 장수생만을 노린 신종 사기 수법이 생긴 것인가?
그 장수생 역시 가진 거라곤 '무소유' 그 자체뿐인걸.
만나고 싶단다.
나 때문에 자기가 떨어졌단다.
묘하게 그 말에 중독성 있었다.
나만 아니었어도 자기가 붙었을 텐데, 하필이면 내가 본인보다 가채점 결과 1점이 더 많아서 떨어질 거란다.
이런 얼토당토않고 어처구니조차 없는 그 말에 콧방귀를 뀌면서도
"가능하면 빨리 만나보고 싶어요. 언제 가능할까요?"
라고 성급했던 그에게 나는 재빨리,
"요즘 담배 농사가 한창이니까 농번기 끝나면 농한기 때 시원해지면 봅시다."
이렇게 답장을 했다.
거 참, 사람 되게 귀찮게 하네'
하지만 공시생 설움 공시생이 안다고, 오죽이나 친구도 없고 할 일이 없으면 농번기에 나를 불러내랴.
얼마나 혹독하게 잘 훈련받은 요원인지 호락호락하지 않다.
아마도 특수요원 출신인가 보다.
작전명 : 가능한 한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서 세상 물정 모르는 이를 밖으로 유인하라.
공부를 그렇게 끈기 있게 할 것이지, 정말 끈질기게도 요구했다.
"얼른 만나고 싶어요. 어차피 시험도 끝났고 저는 국가직 붙을 것 같고 임자 씨는 지방직 붙을 것 같은데, 바쁜 일도 없잖아요?"
재촉하기는......
나 배운 여자야.
언제 봤다고 알지도 못하는데 다짜고짜 만날 수가 있다니?
나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아!
요즘이(2009년) 어떤 세상인데 달랑 쪽지 몇 번 주고받았다고 아무나 막 만나고 그런다니?
머리로는 이렇게 굳게 생각하면서도
.
.
.
.
.
.
요즘은 카페에서 고작 쪽지 몇 번 주고받고도,
"그럼 이쪽으로 오세요. 요새 농사일이 바쁘니까 멀리 못 가요. 브런치산에서 봅시다."
이렇게도 흔쾌히 아무나 막 만나는 그런 요지경 세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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