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안 그래도 말하려고 했는데, 오지 말아라 며늘아."
며칠 전 으레 안부차 전화를 드렸는데, 나는 '여보세요?'라는 말 밖에 안 했는데, '조만간 한 번 갈게요.'라고는 입도 뻥끗 안 했는데 어머님의 첫마디는 저것이었다.
무슨 일이 있으신가?
아니지, 무슨 일이 있으시면 더 가봐야 하는 거 아닌가?
그 무슨 일이 무슨 일인지 알아보기 위해서라도?
"날도 덥고 애들 데리고 왔다 가려면 너희도 힘드니까 오지 말고 추석 때나 와라."
어머님은 단호하셨다.
"합격이 아범이 언제 한 번 간다고 하던데요, 어머님?"
"아니다. 오지 마라 오지 마. 뭐 하러 오냐. 나중에 와."
이상하다. 평소의 어머님답지 않으시다.
보통은
"언제 한 번 올래? 한 번 왔다 가라. 바빠도 잠깐 들러라."
이렇게 말씀하시는 분이다.
곧 어머님 생신이 있어서 겸사겸사 들를까 했었다.
남편이 광복절을 끼고 하루 휴가를 냈을 때 갈까 했는데 어머님의 아들이 한사코 그때는 안 가겠다고 해서 미루고 때를 기다리고 있었다.
"엄마, 나 시가 한 번 갔다 와야겠네."
엄마에게 그런 말을 했을 때만 해도 시가에 갈 계획이 있었다.
"그래. 한 번 갔다 와라. 두 분만 계시니까 한 번씩 가면 좋제. 손주들 얼굴도 보시믄 얼마나 좋겄냐."
엄마는 딸의 시가 방문 계획에 대환영이셨다.
시가에 갈 때 친정집에서 생산한 농산물을 챙겨 줄 테니 꼭 챙겨 가라는 말씀도 잊지 않으셨다.
그런데 어머님이 거절하셨다.
한사코 우리 보고 오지 말라고 하신다.
"이상하네. 어머님이 오지 말라고 하시는데? 내가 먼저 가겠다고 말도 안 꺼냈는데 왜 그러시지? 근데 어머님이 '오늘도' 아들 바꿔달란 말씀은 안 하시네?"
내가 통화하고 아이들도 바꿔준 후 정작 그분의 아드님은 안 바꿔주고 전화를 끊었다.
어머님도 바꿔달라고 하지 않으셨고 그분의 아드님도 바꿔달라고 하지 않았다.
거의 대부분 우리 셋만 통화를 하고 남편은 열외다.
하지만 그날만은 남편과도 통화를 했어야만 했는지도 모른다.
"엄마가 오지 말래? 언제 간다고 전화했었어?"
"아니. 그 말하기도 전에 오지 말라는 말부터 하시던데? 보통 때 같으면 먼저 오라고 하시는데 왜 그러시지?(=전화해서 알아봐.) 혹시 무슨 일 있나?(=전화해서 알아봐.) 갑자기 좀 이상하다.(=전화해서 알아봐.)"
"글쎄. 엄마가 왜 그러시지?"
솔직히 이 더위에 가까운 데 나들이 가는 것도 힘들어서 방학 때 아이들과 여행 한 번을 안 갔다.
시가도 물론 대한민국 영토 안 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한 번 갔다 오려면 큰맘 먹어야 한다.
과거 내가 육아휴직 했을 때는 매주마다 시가에 간 적도 있었지만, 그 후로 뜸했던 적도 있고, 오라고 했어도 가기 싫어서 안 간 적도 있었고, 왔으면 하고 은근히 바라셨던 때에도 내가 내키지 않으면 나는 쏙 빠지고 나머지 세 멤버만 간 적도 있었다. 물론 내가 빠진 날은 시어머니의 아들과 나 사이에 갈등이 극에 달했던 시절이었다.
"엄마, 어머님이 오지 말라고 하십디다. 내가 먼저 간다고 말도 안 했는데 전화받자마자 날도 더우니까 오지 말라고 그러시던데?"
"그래. 가지 말아라. 날도 더운데 너희들 가믄 그 양반도 성가시제. 여름 손님은 아무도 안 반갑다. 집에 오믄 귀찮기만 하제. 오지 마라믄 안 가야제. 나중에 추석 때나 가라."
불과 며칠 전에 시가에 가라고 하면서 이바지까지 싸 주겠다고 하시더니 엄마가 완전히 돌변하셨다.
"여름 손님은 오믄 반갑고 가믄 더 반갑단다."
친할머니가 생전에 자주 하시던 말씀이 귀에 맴돌았다.
친정 엄마도 어느 순간 한여름 자식들의 방문을 달가워하지 않으신다는 걸 느꼈다.
아들이나 딸은 그렇다 치더라도 '며느리'가 온다고 하면 며칠 전부터 쓸고 닦고 치우느라 여간 신경 쓰이는 게 아니라고 하시며 항상 며느리를 어려워하신다.
시어머니도 요즘 무릎도 안 좋고 몸이 불편해서 그러시는 걸까?
오지 말라는 그 말씀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여야 하는 걸까, 그냥 한 번 사양하시는 걸까?
어제도 시어머니와 통화를 했지만 평소와 다른 점을 특별히 느끼지 못했다.
"어머님, 정말 저희 안 오는 게 좋으세요? 저희는 갈 계획을 진작에 다 세워놨었는데 어머님이 오지 말라고 해서 안 가는 겁니다. 나중에 진짜로 안 왔다고 서운해하지 마세요. 정말 안 갈 거예요. 태도를 확실히 해 주세요. 그냥 말로만 한 번 거절하시는 게 아니라 진심으로 안 왔으면 하고 바라시면 '더 단호하게' '아드님에게도' 말씀해 주세요. 괜히 헷갈리게 하지 마시고요. 이런 적이 처음이라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잖아요."
라고는 말씀드리지 못했다.
사람들은 가끔 본심과 다르게 반대로 얘기하는 경우가 있다는 것을 안다.
사실 그대로 말하면 될 것을 특히 오해의 소지가 있는 말은 애초에 정확히 선을 그어서 표현해 줬으면 좋겠는데 그렇지 않을 때가 있어서 가끔 혼란스럽기까지 하다.
괜히 하는 말이 아니라면 서로 정확한 의사표현을 하는 게 좋을 텐데.
좋으면 좋다, 싫으면 싫다, 너무 무례하지 않은 태도로 상대방을 배려하면서 하는 말, 그런 말 한마디 하기가 가끔은 정말 어려운 순간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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