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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하지) 않(은) 남매

너희는 가방을 빨아라, 나는 요령을 알려 줄 테니

by 그래도 나는 2023. 7.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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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방학 첫날이니까 특별히 간단하게 시작하겠어. 무리하지는 않을 거야. 각자 자기 가방을 빨아 보도록!"
아들은 자그마치 6살 적에 제 손으로 똥 묻은 팬티를 빨았던 아이다.
가방 세탁 그까짓 것은 식은 죽 먹기, 누워서 떡 먹기보다 더 쉽다, 고 나는 생각했다.
"엄마, 정말 내가 빨아?"
설마 하는 눈빛으로 아들이 내게 확인받고자 했다.
"당연하지. 저 가방이 누구 것이지?"
"내 것이지."
"누가 사용하지?"
"내가 사용하지."
"그럼 한 번도 써 보지 않은 엄마가 빨아야 할까, 가방 주인인 네가 빨아야 할까?"
분유 뗀 지 어언 9년, 직립 보행한 지도 어언 9년, 도대체 뭐가 문제야?
한글을 몰라? 손가락을 못 움직여?
아~ 무 문제없다 얘야.
 
"엄마가 시범을 보여줄 테니까 한번 잘 보고 배워 봐. 하나도 안 어려워.(=하지만 좀 힘들 수는 있어.) 이제 너희도 자기 물건은 자기가 관리하고 세탁도 하고 할 나이야. 알겠지? 공부는 안 해도 돼. 하지만 살면서 반드시 해야 할 일들은 할 줄 알아야지. 이왕이면 일찍 배우면 좋겠지?"
"알았어. 한 번 해 볼게."
아들은 은근히 도전을 즐기는 성격이다.
옆에서 내가 호들갑 떨면서 살살 부추겨 주면 신이 나서 춤을 출 아이다.
"엄마, 진짜 물 색깔이 변했네. 나 잘하고 있어?"
"우리 아들이 정말 잘하네. 때가 다 쏙 빠졌네. 어쩜 우리 아들은 가방도 이렇게 깨끗이 잘 빨까?" 
"내가 빨래를 잘 하긴 하지."
"직접 해 보니까 어때?"
"좀 힘들어."
"그렇지? 세상에 거저 되는 일은 없는 거야. 하지만 2학기부터는 깨끗한 가방 쓸 생각 하면 좋지? (절대 그럴 리는 없겠지만) 새 가방 같다. 그치?"
"응. 진짜 깨끗해졌어."
그나마 순진하고, 순수한 열 살 아들은 내 계획대로 척척 움직여줬다.
 
"합격아, 이젠 네 차례야."
사실 딸 가방이 더 심란했다.
"엄마, 안 더러운데 곡 빨아야 돼?"
"앞으로 거의 한 달간 안 쓸 건데 이왕이면 깨끗이 빨아서 잘 보관했다가 개학날 쓰면 좋잖아. 지금 장마철이라 잘못 보관하면 곰팡이도 필 수 있고 그래. 빨기만 하면 엄마가 제습 잘해서 관리는 해 줄게."
내 눈엔 그 땟국물이 빤히 보이는데 안경까지 쓴 애가 절대 더럽지 않다고 주장하기만 했다.
"하나도 안 어려워. 너도 이젠 혼자서 다 할 줄 알아야지. 이제 밥도 하고 설거지도 하고 요리도 하고 다 해 봐야지."
깨끗하다, 속이 다 후련하다.

난 이번 여름 방학을 내 살림 비법을 전수할 절호의 기회로 삼았다.
"얘들아, 엄마가 항상 그랬지? 엄마가 있어도 엄마가 없다고 생각하라고. 엄마가 평생 너희 뒷바라지해 줄 수도 없고, 그렇게 하지도 않을 거야. 너희도 이제 간단한 살림 같은 건 스스로 할 수 있어야 돼. 남이 해주기만 바라서는 절대 안 돼. 뭐든 해 보고 배워 놔야 나중에 혼자 살더라도 덜 힘들어. 아무것도 안 하다가 나중에 갑자기 혼자 다 하려고 하면 너무  벅차고 힘들어. 지금부터 미리미리 많이 배워 놔. 알았지? 마침 방학이라 시간도 많잖아."
며느리를 들인 시어머니마냥 나는 내 자식들에게 곳간 열쇠 넘겨주듯 방학 첫날부터 살림 기초를 다지기 시작했다.
2023년은 '남매 기본 살림 다지기의 해'로 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