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늘 나 시험 있는데."
딸이 아침을 먹다 말고 '시밍아웃'했다.
"그럼 준비는 좀 했어?
유난히 민감하고도 날카롭게 남편이 물었다.
"아니. 깜빡했어."
자주 깜빡깜빡하는 딸은 당연하다는 듯 대답했다.
"그런 걸 깜빡하면 어떡해?"
출근 준비를 하다 말고 남편은 딸에게 한 소리 했다.
딸은 제 아빠가 출근한 후 나와 있을 때 그 발언을 했어야 했다.
조용히 넘어갈 수도 있는 일이었는데 말이다.
"괜찮아. 아무 준비도 안 하고 시험 보면 그냥 네 평소 실력이 나오겠네."
평소에 '깜빡증'을 빼면 시체인 나는 충분히 딸의 마음을 이해한다.
우리네 세상살이, 나도 모르게 깜빡해 버리는 순간들이 얼마나 많은가.
그래서 우리는 사람인 것이다, 신이 아니라.
"엄마, 선생님이 오늘 시험 본 거 사인받아오래."
"그랬어?"
"총 다섯 과목 봤는데 가장 못한 과목부터 알려 줄게. 먼저 점수가 제일 낮은 건 사회에서 6개 틀렸어."
저스트 어 모먼트!
지금껏 80점 아래로는 한 번도 받은 적이 없었다.
"괜찮아. 그 정도도 잘했어."
"그다음으로는 국어는 5개 틀리고, 과학은 2개, 영어는 1개 틀렸어."
좋은 소식과 나쁜 소식 중 항상 나쁜 소식을 먼저 듣기를 선호하는 이 엄마의 취향을 적극 반영한 성적 공개 시간이었다.
"그리고 수학은 100점이야."
마지막에 100점짜리를 공개함으로써 극적인 효과를 노리는 솜씨 또한 보통이 아니다.
"역시 매일 꾸준히 하는 과목은 이렇게 티가 나네."
우리 집 아이들은 매일 집에서 영어와 수학을 공부한다.
집에서 EBS와 영어 앱과 수학 문제집으로 일요일만 빼고 항상 하는 일이 그것이다.
"엄마도 맞혀 봐."
이러면서 딸은 국어와 사회와 영어 시험지를 내밀었다.
"우와. 엄마 잘하네. 어떻게 알았어?"
"일단 가장 답이 아닐 것 같은 건 제외해. 그리고 보기 중에서도 답이 없을 것 같을 때가 있거든. 그럴 땐 그나마 가장 답에 가까워 보이는 걸로 골라 봐."
"아, 그래?"
"답을 알고 보면 눈에 금방 보이지? 근데 원래 그런 거야. 답을 모르고 풀면 도저히 모르겠는데 답을 알고 나면 그땐 그럴듯하게 보이거든. 다음에 시험 볼 때 참고해 봐. 그리고 너무 뻔히 답이 금방 나올 것 같은 그런 건 분명히 어딘가에 함정이 있어. 선생님을 그걸 노리는 거야. 그런 데에 변별력을 주는 거지. 그런 건 문제를 많이 풀다 보면 점점 잘할 수 있을 거야."
"아, 그러면 되겠네."
"아무튼 이 정도면 잘한 거야. 엄만 벼락치기했어도 어쩔 땐 점수 잘 안 나올 때도 있었어. 넌 시험 본다고 따로 공부한 건 없었는데 잘한 거지. 넌 어떻게 생각해?"
그런데, 사회 점수가 좀 겸손하긴 하다 그렇지?
"그리고 이번 시험 봐 보니까 알겠지? 평소에 꾸준히 한 영어랑 수학은 점수가 잘 나오잖아. 근데 다른 과목은 전혀 신경도 안 쓰니까 정말 점수 차이가 크지? 이래서 뭐든지 꾸준히 하는 게 중요한 거야."
딸이 갑자기 문제를 풀어보라고 할 거라곤 예상도 못한 일인데 속으로 답이 틀리면 어쩌나 조마조마했는데, 그나마 엄마 체면이 조금 섰다. 물론 다 맞힌 것도 아니었다.
5과목 중에 일찌감치 '수학' 문제지는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그 일은 그날 내가 최고로 잘한 일이라고 장담할 수 있다.
수학은 나랑 안 친하다.
남편 몫도 남겨 둬야지.
어떤 멤버가 없을 때 우리끼리만 맛난 음식을 모조리 먹어 치우고 아빠 몫을 안 남겨 놓는 일만큼이나 이건 몹쓸 짓이다.
대한민국 부모에겐 자녀의 시험지를 골고루 재배분하여 다시 풀어 볼 권리가 있다는 걸 나는 잘 안다.
그가 마음껏 권리 행사를 할 수 있도록 적극 협력해야 한다.
"영어랑 수학은 합격이가 반에서 1등이래!"
영어랑 수학에서 사실, 딸과 똑같은 점수를 받은 친구가 한 명 더 있긴 했지만, 엄밀히 말하자면 공동 1등이지만 '공동'이라는 말은 살며시 괄호 속에 감추었다.
성적 지상주의자는 아닌 엄마지만 그 순간만큼은 '1등'이라는 그 효녀스러운 단어가 온전히 딸만의 것으로 남길 바랐다.
어쩔 수 없는 팔불출 엄마다.
자랑스러운 걸 어쩌라고.
"근데 요즘 시험은 우리 때랑 진짜 다르다. 이게 어딜 봐서 5학년 문제야? 옛날엔 영어도 이 정도는 중학교 가서 배웠던 거 같은데. 아무튼 요즘 초등생들도 보통 아니다."
퇴근하고 온 남편에게 슬쩍 말을 흘렸다.
딸이 수학에서 문제 하나라도 틀렸으면 또 기세등등하게 일장연설을 할 준비를 마친 그는 안타깝게도 100점짜리 수학 문제지 앞에서 우쭐 댈 기회를 놓쳤다.
"역시 매일 꾸준히 하니까 이렇게 점수가 잘 나오네. 그렇지?"
다만 이 말만 딸에게 할 뿐이었다, 고 하려는 찰나, 드디어 일장연설이 시작되었다.
"근데 사회 점수가 너무한 거 아냐? 시험을 본다고 하면 미리 준비를 좀 했어야지. 미리 공부했으면 더 잘했을 텐데 아무것도 준비 안 하니까 이렇잖아. 앞으로는 며칠 전에 준비하자. 최소한 일주일 전에라도."
난 이번 기회에 과목별로 딸이 어느 정도의 수준인지 알게 되었다고 생각했는데 남편은 점수가 좀 아쉬운 모양이었다.
난 딸이 이번 사건(?)을 계기로 뭔가 느끼기를 바랐다.
"합격아, 너도 해 보니까 알겠지? 뭐든지 꾸준히 하는 건 이렇게 티가 나. 안 하는 건 그만큼 티도 안 나고. 앞으로 네가 어떻게 해야 할지 잘 생각해 봐. 조금만 더 신경 쓰면 더 나은 결과가 나올 수 있을 거야. 공부는 네가 스스로 하는 거야. 네가 성적을 잘 받고 싶으면 미리 준비를 하면 될 거고 그만큼 보람도 있겠지? 하지만 무관심하면 그만큼 결과는 좋지 않아. 선택은 결국 네가 하는 거야. 근데 공부란 게 을지로 하면 재미도 없고 하기 싫은데, 하나씩 알아가는 즐거움을 알게 되면 그땐 진짜 재미있어. 엄만 그렇더라. 모르던 걸 알게 된다는 게 얼마나 재미있는 일이야? 너도 언젠가 그걸 알았으면 좋겠다."
은근하고도, 의미심장하게 나는 살짝 딸에게 말해줬다.
"괜찮아, 괜찮아. 꼭 시험을 잘 봐야 하는 건 아니잖아?"
그러면서 현란한 손놀림으로 슬라임만 주물럭 거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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