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흔(하지) 않(은) 남매

엄마를 그런 사람으로 만들어 버리다니

by 그래도 나는 2024. 11. 21.
반응형

 

"엄마는 국민학교 다녔어?
"응."
"진짜 옛날 사람 맞네."
"국민학교 다니면 옛날 사람이야?"
"지금은 초등학교라고 하잖아. 옛날 사람들은 국민학교 다녔다며?"
"그래도 엄마는 오전 반 오후 반으로 나눠서 할 때 다닌 건 아니야."
"아무튼 옛날 사람 맞잖아."
 
옛날 사람이면 뭐 하고 요즘 사람이면 뭐 하려고 그러지?
내가 국민학교를 다니면 뭐 하고 초등학교를 다니면 뭐 한다고 걸핏하면 나의 과거를 들추는지 모르겠다.
가만 보면 딸은 내 앞에서 그런 말을 하며 내가 발끈하는 모습에 재미가 들린 것 같았다.
또 학교에서 수업시간에 뭘 배워서 저럴까?
수업 시간에 무슨 내용을 보았길래 이렇게 집에 와서 확인하려는 걸까?
가끔 딸은 뭔가 단단히 착각하는 것 같았다.
"너희는 정말 좋겠다. 날마다 학교에서 맛있는 급식 먹을 수 있잖아."
아침마다 급식 메뉴를 확인하고 진심으로 내가 그렇게 말하면 딸은 또 난생처음 들어 보는 소리라는 표정으로 이렇게 대꾸한다.
"엄마, 엄마는 학교 다닐 때 급식 안 먹었어? 학교에서 다 주잖아. 엄마, 초등학교 안 다녔어? 아, 맞다. 엄마는 옛날 사람이라 국민학교 다녔지."
이런 유치한 말도 내 앞에서 서슴지 않는다.
"엄마가 학교를 왜 안 다녀? 엄마는 거의 40년 전에 유치원도 다닌 사람이야. 외삼촌들 세 명은 아무도 안 다닌 병설 유치원에 엄마만 다녔다고! 엄마 병설 유치원 나온 사람이야."
'영어 유치원'도 아니고(하긴 그 옛날 그 시골에서 나는 '영어 유치원'이란 게 있는 줄도 모르고 살긴 했었다.) 작은 시골 학교의 자랑스러운 병설 유치원 출신임을 분명히 짚고 넘어갔다.
그리고 살짝 어이가 없긴 하지만 눈 질끈 감고 나는 또 딸에게 이실직고를 해야만 한다.
또 내 의지와는 전혀 상관없이 옛날 사람이 되어야만 한다.
"엄마 학교 다닐 때는 급식이 없었어. 날마다 도시락을 싸가지고 다녔어. 도시락 싸는 게 보통 일이 아닌데 말이야."
"정말 급식을 안 먹었어? 도시락을 싸가지고 다녔다고?"
"그래. 지금 어쩌다 한 번씩 너희 도시락 싸는 것도 쉬운 게 아닌데 날마다 외할머니는 얼마나 힘들었을까? 하루에 네 개가 기본이었을 거 아니야."
"그게 더 좋은 거 아니야? 그러면 집에서 맛있는 것만 싸서 가져갈 수 있잖아. 학교에서 급식 먹으면 싫어하는 것도 억지로 받아야 하는데."
"합격이 네가 뭔가 착각하고 있는 거 같다. 그게 네 생각처럼 되는 줄 알아? 우리가 먹고 싶다고 해서 그것만 반찬으로 싸 갈 수 있었던 게 아니라니까. 외할머니가 싸 주시는 대로 그냥 가져갔지. 어떻게 자식들 네 명이 먹고 싶은 대로 다 맞춰서 쌀 수 있겠어. 그게 보통 일이 아닌데. 그것도 일주일 내내 말이야."
"그렇긴 하겠다."
"그래. 그래도 친구들이랑 모여서 같이 밥 먹으면 다들 다른 반찬 싸 오니까 남의 집 반찬도 먹어 볼 수 있고 그건 좋았지. 오늘은 친구들이 무슨 맛있는 반찬을 싸 왔을까 기대하면서 말이야. 요즘 너희는 아침마다 급식 메뉴가 알림으로 와서 다 알고 학교에 가잖아. 엄마 학교 다닐 땐 도시락 임자도 무슨 반찬이 들어 있는지 잘 몰랐어, 열어 봐야 알지. 물론 점심시간에 도시락을 먹어 본 기억이 거의 없긴 하지만 말이야."
"점심시간에 안 먹으면 언제 먹었는데?"
"일단 1교시나 2교시 끝나면 1차로 먹고, 오후에는 3시 넘어서 먹었던 것 같은데. 고등학교 다닐 때는 도시락을 저녁까지 두 개씩 싸가지고 다녔거든."
"그렇게 아무 때나 도시락 먹어도 돼?"
"배고프니까 먹었지. 꼭 시간 맞춰서 밥 먹으란 법은 없잖아."
점심시간이 되기도 전에 1,2 교시가 끝나면 배고픔을 이기지 못해 순식간에 도시락을 비워버리던 시절이 있었다. 이런 걸 고급 전문 용어로 '도시락 까먹는다'라고 한다지 아마?
교복 치마 안에 체육복 바지를 굳이 또 입고 조신하게 모여 앉아 허겁지겁 도시락을 흡입하던 그 시절의 청순한 소녀들, 자고로 한 번도 도시락을 까먹지 않은 소녀는 있을지언정, 한 번만 도시락을 까먹은 소녀는 없었다.(고 나는 굳게 믿는다. 적어도 나의 무리들은 그러하였다.)
"학생이 그래도 돼? 정해진 시간에 먹어야지."
가끔 딸은 너무 곧이곧대로다. 융통성이란 걸 모른다. 하지만 이런 내 딸도 머지않아 교복 치마 안에 체육복 바지를 껴 입고  학교 담장을 넘을지도 모른다.
"학생이니까 그랬지. 생각해 보면 그때가 정말 좋았는데. 친구들 반찬이 정말 맛있었어. 아직도 생각 나."
나 혼자만 추억에 감겨 있는 사이 갑자기 딸이 제 동생과 아빠를 급히 찾았다.
"야, 너 그거 알아? 엄마는 학교 급식 안 먹었대. 날마다 도시락을 싸가지고 다녔대. 세상에!"
"아빠, 아빠! 엄마가 옛날에 도시락 싸가지고 다녔던 거 아빠도 알고 있었어? 학교에서 급식을 안 줬대."
거기까지는 괜찮았다.
그러나 이내 딸은 마지막 쐐기를 박았다.
"학교  급식을 시작한 지가 언젠데 그것도 안 먹고. 역시 엄마는 옛날 사람이 맞았어!"
옛날 사람이면 어떻고 요즘 사람이면 어떠랴.
내게 중요한 건 그 옛날 친구들과 함께 했던 많은 시간들, 자꾸 떠올려도 지겹지 않은 기억들, 잡히지 않아 더 애틋한 그 시절의 모든 것이다.
옛날에 우리는 얼마나 좋았던가.
옛날에 우리는 얼마나 풋풋했던가.
그때는 몰랐지만 지금 돌아보면 정말 좋았던 시절.
옛날이 좋았어, 옛날이.
이런, 
또 옛날 사람 같은 소리만 하고 있다.
 

'흔(하지) 않(은) 남매' 카테고리의 다른 글

또 나가?  (0) 2024.11.25
엄마가 그랬다는 증거 있어?  (0) 2024.11.22
결국 가졌네, 7년 만에  (0) 2024.11.20
6학년 때 산 스마트폰이 마르고 닳도록  (0) 2024.11.13
옛날 PC방이 아니다  (0) 2024.11.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