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가신청은 했어?"
"진작 해버렸어, 이틀."
"벌써?"
"연말이잖아. 쓸 사람은 미리 다 쓰라고 해서."
"맞다, 연말 되기 전에 쓸 사람은 미리 결재 올려야 하지?"
이 양반이 이거 이거 내가 아무리 거기서 발 뺐다고, 아무리 깜빡깜빡한다고 은근슬쩍 조용히 넘어가려고 했던 거 아니야, 이거?
이렇게나 입이 무거운 사람이라니.
차라리 과묵한 남자가 좋다는 내 노동요는 이제 그 맥을 끊어야 할 것만 같다, 과감히.
이렇게도 할 말을 안 하고 해야 할 말은 안 하고, 하지 말아야 할 말만 해대는 사람이 우리 집에 한 명 있다.
"근데 연가 보상비는 아직 안 들어왔어? 지금쯤 들어왔을 것 같은데?"
그날이 12월 21일이었다.
"오늘 들어온다고 했는데. 아직 안 들어왔나? 문자가 안 왔네."
"문자 안 왔음 안 들어온 거겠지. 그럼 내일 들어오려나 보다."
"내일이었나? 아, 맞다. 내일이이다. 근데 내 연가보상비 들어오는 날짜는 당신이 어떻게 알아?"
이 양반아, 어떻게 알긴?
나도 옛날에 이맘때쯤 받았던 기억이 용케도 생각나서 그냥 던져 본 말이지.
까맣게 잊고 있다가 그냥 느닷없이 생각나서 한 번 해 본 말이라고.
그런데 덥석 미끼를 무네?
왜 이렇게 내게 알리고 싶어 하지 않는 게 점점 많은 것 같은 느낌이지?
그렇잖아도 이젠 옛날 일들이 가물가물해져서 자꾸 정근 수당 나오는 달도 헷갈리기 시작하는데 말이야.
"점점 얘기를 안 해주구만?"
"뭘?"
"월급 말고 다른 것들 말이야."
"다 알잖아. 일해 봤으면서 그래."
"그때가 언젠데? 다 잊어버렸어. 생각도 안 나."
"뭘 그래. 잘만 기억하고 있던데."
"나도 이젠 깜빡깜빡한다니까. 근데 내가 먼저 물어보기 전까지는 절대 말도 안 해주니까."
"다 아는데 뭘 말하고 말고 해?"
"뭐 본인이 벌어서 본인이 받는 거니까 간섭할 일도 아니지만 그래도 나도 알고 있어야 되지 않나 해서 그런 거지. 이제 월급을 안 받으니까 감이 없어."
"이것저것 받아도 남는 거 하나도 없어. 대출 갚고 카드 대금 내면 끝이야."
내가 언제 남겨 먹는 거라도 있냐고 물어봤었나?
그냥, 순수하게 궁금한 게 있을 때마다 물어본 것뿐이지.
월급이고 정근수당이고 명절휴가비고 출장비를 받아도 남는 건 하나도 없다고, 순식간에 다 사라지고 없다고 굳이 하지 않아도 될 말을 왜 하고 자꾸 또 하는 거람?
이런 걸 소위 고급 전문 용어로 '도둑이 제 발 저린다'라고 한다지 아마? 유사 표현으로는 '강한 부정은 강한 긍정' 이런 게 있을 테고 말이다. 자꾸 남는 거 없다, 없다 하는 걸 보니 뭐가 남긴 남으시나 봐?
내가 언제 그것들을 받아서 얼마나 남아있냐고 그걸 물어본 것도 아닌데?
그래도,
솔직히,
하나도 안 남는다는 건,
그건 좀 아니지 않수?
우리 집이 흥청망청 쓰는 집도 아니고
최소한 적자는 아니고,
그럭저럭 살고 있는 것쯤은 나도 안다우.
어디 크게 나갈 곳은 없고 매달 비슷하게 쓰고 살고 있으니까 별 것도 없다는 건 내가 잘 알지.
그렇게까지 펄쩍 뛸 필요는 없어.
내가 달라는 것도 아니잖수?
장사 하루 이틀 하시나.
그렇게 과민반응할 때마다 더 의심스러워진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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