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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나의 기쁨=나의 고통

을지훈련을 위하여 민방위복을 다린다

by 그래도 나는 2023. 8.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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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민방위복 집에 있나?"

"백 년 전에 내가 트렁크에서 빼 왔잖아."

"그거 안 입은 지 오래됐을 텐데 괜찮을까?"

"천 년 전에 내가 다 세탁해 놨잖아!"

"다음 주 을지훈련 있으니까 챙겨가야 되는데 어디 있지?"

"어디 있긴 어디 있어? 1억 년 전에 내가 방에 걸어 놨지."

"나보고 꼭 차에 갖다 두라고 말해 줘."

"내가 진작에 갔다 놓으라고 기원전부터 얘기했는데 아직도 안 갖다 놨어?"

 

아니, 을지훈련이 닷새씩 남았는데 벌써부터 그것을 갖다 두시겠다니!

너무 서두르는 거 아니야?

왜 이렇게 변해버린 거지?

그 양반답지 않잖아, 이건?

지난번처럼 민방위복이 어디 있는지도 모르고, 지각까지 해서 정말 찍혀 센세이션을 일으켰던 예의 그 양반은 어디로 가셨나?

 

"민방위복이 너무 쭈글쭈글하다.(= 다림질 좀 해 줘.) 주름이 어지간해야 말이지.(=다림질 좀 해 줘.) 그래도 직장인데.(=다림질 좀 해 줘.) 이거 그대로 입어도 될까?(= 다림질 좀 해 줘.) 이거 입고 있으면 사람들이 뭐라고 하겠다, 속으로.(=다림질 좀 해 줘.) 관리가 너무 안된 거 아니야?(=다림질 좀 해 줘.)"

"알았어, 알았어. 내놓기나 해."

기원전 2,000년 경에 그 양반의 차 트렁크에서 그 유물을 발견해 낸 사람은 맹세코 나였다.

그러면서 혹시 모르니 미리 챙겨서 사무실에 갖다 놓고 필요할 때 입어야 하지 않겠느냐고 넌지시 말한 사람도 나였다. 

그 유물의 주인은 시큰둥하기만 했다.

"저번처럼 또 닥쳐서 민방위복 찾고 난리 칠 거야? 한 번 했으면 됐잖아. 정신 좀 차리고 미리 챙겨 가."

이런 복음을 전한 지 3달도 더 지났다.

바로 세탁을 하고 다림질까지(굳이 그럴 필요까지는 없었으나 당시 그 양반의 소원은 그 무엇보다 다림질이 먼저였다.) 마치고 다음 날 가져가라고 옷걸이에 걸어 눈에 잘 띄는 곳에 걸어 두었다.

 

"그냥 내 민방위복 입을래? 내가 그때 좀 큰 사이즈로 신청해서 (택도 없는 말이지만, 절대 그럴리는 없지만) 아마 맞을지도 몰라."

"어? 당신 것도 있었어?"

"근무할 때 받은 거 있지. 나도 한 번도 안 입은 것 같다. 별로 입을 일은 없잖아. 그리고 안 입어야 더 좋은 거고. 입을 일이 없어야 별일 없는 거니까."

"그래? 그럼 한 번 입어 볼까?"

보통 사이즈 100을 입는 그 양반과 85를 입는 나, 

애초에 잘못된 만남이긴 했다.

내 민방위복 사이즈는 95였다.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만에 하나 한 사람이 민방위복을 잃어버렸을 경우를 대비해 남편과 번갈아 가며 입을 요량으로 95로 신청했던 것이다. 

100을 입는 남자가 95를 소화해 낼 수 있으려나?

일단 시도는 해 보기로 한다.

그 양반 소유의 민방위복을 다림질하기 싫어서가 결코 아니었다.(고는 양심상 말 못 한다.)

못 볼 꼴을 보게 될지도 모를 일이지만 말이다.

그러나, 나에게는 루스핏, 그 양반에게는 레깅스, 뭐 이런 느낌이랄까?

어쩌면 크롭티를 닮았다.

옷 길이가 모자라도 한참이나 모자랐다.

안 그래도 모자란 게 있는 양반인데 옷감까지 모라랄 수야 없는 노릇이지.

 

"좀 작은 것 같지 않아?"

작은 것 같은 게 아니라 작다.

"아니, 뭐... 그런대로 괜찮은데? 입고 돌아다니지만 않으면 되겠어. 그냥 가만히 앉아만 있으면 감쪽같아. 딱 맞아. 완전 맞춤옷이야. 요즘 누가 옷을 크게 입어? 딱 맞게 입지."

그러나 그 옷은 단순한 옷이 아니라 민방위복이다.

"내가 보기엔 좀 작아 보이는데."

작아 보이는 게 아니라 작다니까 그러시네.

"그렇게... 작은 것 같지는 않은데? 어차피 금방 입고 벗을 거잖아."

"그래도 좀 그런데..."

"입고 얌전히 자리에만 앉아 있든지 아니면 돌아다닐 거면 얼굴만 가리면 돼. 걱정하지 마."

그때까지만 해도 그 양반 소유의 민방위복을 다리고 싶지 않아 그나마 상태 양호한 내 민방위복으로 갈음하고자 시도했던 것이다.

 

"안 되겠어. 그냥 내 옷 입어야지."

하긴, 나도 아무리 하얀 거짓말을 한다고 해도 내 옷이 그 양반 몸에 맞다고 끝까지 우길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아빠, 옷이 왜 그래?"

결정적인 딸의 한 마디가 나와 그 양반의 의지를 꺾어버렸다.

 

"옷은 잘 챙겨 놨어?"

"응, 차에 미리 갖다 놨어."

"가져간 김에 사무실에 갖다 놓지 또 차에 뒀어?"

"괜찮아. 그래도 안 가져갈 일은 없으니까."

"근데 월요일에 몇 시까지 가야 한댔지?"

"8시까지."

"그럼 최소한 7시 반까지는 도착하게 해. 미리 준비해서 나쁠 거 없잖아?"

"괜찮아. 7시 반에 출발하면 돼."

민방위복은 이제 해결 됐는데 과연 제때 출근할 수나 있을지, 이젠 그게 도 걱정이다. 이렇게나 그 양반은 '물가에 내놓은 어른'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