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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어리 살어리랏다 전원에 살어리랏다

이건 늙은 것 같은데?

by 그래도 나는 2025. 6.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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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클 때까지 놔뒀어? 진작 따 버리지."

"너 오믄 줄라고 아껴놨제."
"이런 걸 뭐 하러 아껴. 없으면 그만이지."
"우리 애기들도 먹으라고 그랬제."
"그냥 엄마랑 아빠 드셔."
"우리는 나중에 따 먹으믄 된다."
 
엄마는 또 기다리고 기다리셨다.
딸이 올 때까지.
오이가 클 때까지.
그 오이가 늙어갈 때까지.
한 두 번 있는 일도 아닌데 새삼스러울 것도 없는데 딸 시기가 좀 지난 것 같은 오이를 보자 순간 나는 그 말을 해버렸다.
"오이가 많이 열었더라. 갈 때 가지고 가라."
"벌써?"
"벌써는 뭐가 벌써냐. 진작에 열었다."
"그새 그렇게 컸어?"
"내가 너 오믄 갖고 가라고 할라고 따 놨다."
"다 컸으면 엄마랑 아빠 따서 드시지 뭐 하러 놔뒀어?"
"우리는 아무 때나 따 먹으믄 쓰제."
엄마는 그 기다란 것들을 냉장고에 고이 모셔 둔 그 상큼한 것들을 내게 건네며 말씀하셨다.
그 앞에서 나는 
"엄마, 요즘 오이가 얼마나 싼데 그래? 사방에 널린 게 오이라고. 한 개에 천 원도 안 해. 먹고 싶으면 내가 사 먹으면 되는데 그거 얼마나 한다고 나 올 때까지 기다리고 있어? 저거 하나는 너무 늙은 거 아니야? 진작에 땄어야 되는 거 아니냐고? 늙으면 맛도 없어. 뭐 하러 맛 없어질 때까지 기다려? 뭐든 싱싱하고 맛있을 때 먹어야지. 너무 오래되면 맛도 없어. 왜 꼭 맛없을 때까지 기다려? "
라고는 심술부리지 않았다 물론.
맞다.
요즘 오이가 정말 많이 가격이 내렸다.
마음만 먹으면, 아니 마음먹지 않아도 가볍게 그냥 한 두 개 살 수 있다.
원래는 연한 연두색일 때, 연할 때 따서 먹는 게 맞는 것 같은데 저렇게 진한 녹색으로 물들어갈 때까지 기다릴 필요가 없을 것 같은데 시간이 지나니 아무래도 연한 맛은 덜하다. 그래도 오이는 오이지. 그런 거 먹는다고 탈 나는 것도 아니고 문제가 있는 것도 아니긴 하다.
노각이 따로 있긴 한데 저런 오이도 따는 시기가 늦어지고 오래 매달려 있으면 노각처럼 정말 늙어가는 걸 많이 봤다. 
"인자는 오이 사 먹지 말아라. 집에 많이 있다."
엄마는 신신당부하는 것도 잊지 않으셨다.
엄마의 단골멘트, 먹을거리가 풍성해지는 여름이 되면 항상 그러신다.
오이고추, 양파, 수박, 호박, 가지, 토마토, 무화과...
이미 집에 있는데 굳이 돈을 주고 사는 건 거의 죄악시하신다, 거짓말 조금 보태자면 말이다.
"많으니까 너랑 나랑 나누자."
분명히 그렇게 말씀하시고는 저 기다란 것들을 몽땅 다 싸서 내 가방에 넣어 주셨다.

밥을 먹기는 그렇고 배가 살짝 고파져서 오이를 하나 씻었다.
그깟 오이, 하나에 천원도 안 하는 흔해 빠진 오이 한 덩이, 그렇긴 하지만 부모님이 키워 준 오이는 맛이 달랐다.
 
딸은,
딸 마음은 흐리멍덩한 어린 연둣빛이라면,
엄마는,
엄마 마음은 단단하고 알차게 잘 여문 진녹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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