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리 남편을 달래보고 설득도 해보고 급기야 협박도 해 보았지만 지난번의 나처럼 남편도 만만찮게 단호했다.
"솔직히 인간적으로 이제 막 결혼해 놓고 다짜고짜 일 그만둬버린다고 하면 어떡해? 혼자 몸이면, 결혼 전이라면 또 몰라. 이렇게 나올 거였으면 결혼 전에 미리 나한테 얘기라도 해줬어야 하는 거 아냐? 설마 나 믿고 그만두는 거 아니지?"
믿을 사람을 믿어야지, 나 믿을 사람 못된다.
알잖아?
"전부터 계속 생각은 하고 있었어. 나도 쉽게 결정한 거 아니라니까."
"아니야 내 생각엔 지금 뭔가 착각하고 있는 것 같아. 지금은 못 다닐 것 같아도 조금만 시간 지나 봐. 또 그럭저럭 다니게 된다니까? 내 친구 00 있잖아. 알지? 내 친구도 국가직이야. 지금까지 우체국 잘 다니고 있어! 근데 왜 자긴 못 다닌다고 그래? 남들도 다 잘 다니는데 말이야."
'남들도 다 잘 다닌다'라는 그 말은 하지 아니했어야 옳았다.
그때 내가 경솔하게 내뱉은 그 말을 남편은 ctrl+c 해 놨다가 올해 나에게 ctrl+v로 갚아 주었다.
일은 거의 같이 하지만 몸으로 하는 일, 힘을 좀 써야 한다 싶으면 여자들이 쏙 빠진다(남편이 근무했던 그곳)는 거다. 바쁠 땐 창구직원이고 뭐고 필요 없단다.
일은 일대로 다 하고 퇴근 시간이 지나면 택배 관련 일을 같이 도와야 한다고 했다.
우체국 직원의 숙명이었다.
저녁 8시가 되어도 집에를 못 간다.
지역 특성상 무거운 농산물 관련 택배가 아주 많은 곳이었다.
시골의 작은 한가한 우체국도 아니고 그 군을 대표하는 우체국이었으니까. 가장 규모도 컸고 일도 많았고 직원도 많았고.
"난 이해가 안 되네. 요즘 세상에 여자라고 힘들다고 빠진다는 게 말이 돼? 나 봐. 우리는 여자고 남자고 필요 없어. 공무원이 남자 여자가 무슨 상관이야. 그런 게 어딨어? 그냥 공무원이지. 구제역이든 AI든 비상근무 떨어지면 밤 12시까지도 시골구석에 들어가서 비상근무 다 서고, 폭설 내리면 다 삽 들고나가서 면사무소 앞 눈 치우고, 겨울에 연탄 다 날라서 배달해 줘."
"우체국은 안 그런다니까. 여기가 이상한 건지 남자가 불리해."
남편이 일했던 그곳만 그랬는지 어쨌는지는 모르겠다.
그곳이 알고 싶지는 않다.
상식적으로 이해가 안 간다.
"그리고 내 성격 알잖아. 나 보험 같은 거 못 파는 성격이란 거."
거기까지 말하면 나도 더 할 말은 없다.
"우체국 들어가면 보험 팔아야 한다는 거 몰랐어? 다 알고 시험 본 거잖아? 그런 생각도 없이 시험 본 건 아니지 설마? 그럴 거면 아예 다른 직렬로 시험을 봤어야지."
"일단은 빨리 붙으려고 그랬지."
"빨리 붙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정년 때까지 계속 일할 수 있는 그런 데로 갔어야지 그럼. 길게 봐야지. 당장 급하다고 아무 직렬이나 시험 봐서 가놓고 이제 와서 못한다고 하는 게 말이 돼? 애초에 생각을 잘했어야지."
"그래도 그땐 붙는 게 먼저니까."
"나 봐봐. 그러니까 애초에 난 그 직렬로는 시험도 안 봤잖아. 거기서 하는 업무 내용 알고 아예 그쪽은 시험 보지도 않았어."
하다가 중간에 후회하면서 눈물 짜느니 아예 시작도 안 해야겠다고 해서 그런 거다.
물론 성적도 잘 나오지 않았으니까 다른 직렬도 떨어졌지만.
그래도 국가직은 커트라인이 높은 편인데.
나와 같은 지역을 지원한 지방직 시험에서는 불합격했지만 국가직 시험은 (본인 말로) 우수한 성적으로 합격했다고(아직까지도 사실인지 아닌지도 확인 못한, 굳이 확인하고 싶지도 않은) 거드름 피우던 때가 눈에 선한데 이게 무슨 날벼락이란 말이오 이 사람아!
"아니 어떻게 들어간 덴데 그만두겠다는 거야? 자기 공부할 때 생각해 봐. 힘들었다며? 고생했다며? 어쩌자고 이러는 거야?"
올해 초 있을 일을 11년 전에 미리 예습을 했던가 보다, 우리 부부.
의원면직도 선행학습이 필수과목이었다 우리 집은.
역시 쇼윈도 부부답다.
사이도 좋아라.
의원면직도 너 한 번 나 한번. 세상 공평한 부부의 세계로세.
맞다, 저 성격에 보험 절대 하나도 못 판다.
오히려 보험 강매당할 성격이다.
한 치의 의심도 없다.
내 없는 명예를 다 걸고.
내 친구도 그랬다, 국가직 다 좋은데 보험 그거 때문에 너무 스트레스받는다고.
나도 그 친구가 사정하길래 하나 들어줬었는데.
다른 건 몰라도 이제 수습 기간이 지나고 본격적으로 보험을 팔아야 할 때였다.
그 시기가 도래하기 전에 미리 그만두겠다고 한다.
그래, 나도 그 보험 무서워서 아예 시험도 안 본 거잖아.
그 마음은 충분히 이해가 된다.
서서히 내 마음이 누그러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1,2년 할 것도 아니고 30년도 넘게 남았는데 그때까지 보험 때문에 스트레스받고 살면 너무 힘들 것 같아. 길게 보면 보험 팔면서 정년 때까지 다닐 자신도 없고. 그 일을 평생 해야 한다고 생각하면 너무 스트레스받아."
그래 길게 봐야지, 인생은 긴데.
"대충 버티면서 억지로 다니다가 중간에 그만두는 것보다 아니다 생각 들었을 때 그냥 그만두는 게 더 나을 것 같아, 길게 보면."
도대체 얼마나 길게 보는 건데?
"알았어."
내가 남편이라도 못할 것이다.
못하기도 하고 아예 하고 싶지도 않다.
오죽이나 싫었으면 국가직 시험도 안 본 사람이 바로 나 아닌가.
남편 말도 일리가 있다.
아니다 싶으면 과감히 결정을 내려야 한다.
누가 내 인생 살아주는 것도 아니고 뭐가 아쉬울 게 있다고.
이제 보니 내가 남편한테 못된 것만(?) 배웠네.
아니다 싶을 때 과감히 결단 내리는 일.
"그래. 그럼 그만둬."
"정말? 찬성하는 거야?"
"본인이 못하겠다는데 어떡해 그럼? 대신 그 행동에 책임은 져야지."
"걱정하지 마 자기야. 나 다시 공부하려고."
"뭐? 공부 다시 한다고? 그 짓을 또?"
"자신 있어."
자신만 있다고 붙는 게 공무원 시험이다냐 이 철없는 사람아?
점수가 높아야 붙는 게 공무원 시험이다.
공무원 시험은 자신감으로 합격하는 게 절대 아니야.
높은 점수를 받아야 붙는 거야.
알 만한 사람이 왜 저러실까.
나는 다시는 그 시절 겪어보고 싶지 않은데 남편도 대단하다.
어떻게 다시 공부할 생각을 했는지.
하긴 그 험난한 시절을 겪어서, 그리고 공무원으로 일해봐서, 결정적으로 지금의 남편(아마도 가장 많은 비중은 차지하는 요인)과 11년을 살아 봐서 어지간한 일은 이제 하나도 무섭지도 않다. 무슨 일이든 다 할 수 있을 것 같다.
다 할 수 있을 것 같다고 했지 다 할 수 있다고는 안 했다, 분명히 말하지만.
추후 오해의 소지가 있는 발언은 원천 봉쇄하기로 한다.
남들은 공무원도 못하고 그만두면 어디서 무슨 일을 할 수 있겠냐고 그만두는 사람들한테 다들 똑같은 소리 하지만 공무원 생활해 본 사람은 알 것이다.
대한민국에서 공무원으로 일해 본 사람들은 어디 나가서 뭔 일이든 다 잘할 수 있다. 고 우리들끼리의 확신이 있다.
공무원 세계가 그렇게 알록달록 아름답기만 한 줄 아시나 본데.
흙탕물 튀기고 이판사판, 이 꼴 저 꼴 다 보는 데라고 거기가.
사기업과 별반 다르지 않을걸?
알랑가 몰라.
이젠 많이들 아는 것 같다 다행히도.
"어디까지나 앞으로 뭘 하든 그건 본인 일이고 본인이 책임을 질 일이니까. 알아서 해."
"걱정하지 마 자기야. 고마워. 난 자기가 끝까지 반대할까 봐 걱정했는데."
뭣이라? 내가 그렇게 나올 줄 알고서도 그랬단 말이야 지금?
"걱정을 왜 해 내가? 그건 자기 일이잖아. 내 일이 아니고. 자기 직업 자기가 그만두겠다는데 내가 뭐라 하겠어. 그리고 걱정한다고 뭐가 달라져? 이미 자기도 다 마음속으로는 결정해 버렸잖아. 상의가 아니라 통보잖아."
"아니야, 난 자기랑 상의해 보려고 했어."
"어쨌든 난 걱정 안 해. 안 그래도 나 바쁜 사람인데 남 걱정할 시간도 없어. 그리고 걱정한다고 세상에 달라지는 건 없으니까."
"자기 어떻게 말을 그렇게 해? 내가 남이야?"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 그럼 남은 남이지.
정신 바짝 차리란 소리야.
"근데 무슨 공부 할 건데?"
"교육행정직 준비하려고."
"뜬금없이 웬 교행?"
"교행도 괜찮은 것 같아서. 학교 가면 5시에 끝나고 좋잖아. 그래도 시험 본지 얼마 안 돼서 아직 머리에 남아 있을 때 공부하면 아무래도 좀 더 나을 것 같아서 준비해 보려고."
알았어 알았어 뭔 말인지 알겠지만, 그건 니 생각이고.
"난 그 짓 다시 하라고 하면 절대 못할 텐데 어떻게 다시 공부할 생각을 했어?"
"이제 와서 내가 뭐 다른 걸 하겠어. 공부하던 거니까 해 보는 거지."
"알았어. 알아서 할 일이지 뭐(=정신 차리고 공부해서 얼른 붙어라잉.)
나는 잠시 그런 생각을 했다.
'지금이라도 안 늦었다. 혼인 신고하기는 했지만 다행히 아직 임신은 안 했으니까. 어떻게 돌이킬 수 있는 방법 없을까?'
민원실에서 근무할 때 간혹 혼인취소소송(이었던가 혼인무효소송이었던가?)을 해서 그 판결문을 들고 왔던 어떤 이를,혼신의 힘을 다해 떠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