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나의 기쁨=나의 고통

남편이 집에 없을 때 나는

그래도 나는 2024. 8. 8. 2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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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얘들아, 오늘 아빠 없는 거 알지?"
 
(남편) 님은 갔습니다.
아, 사랑하는 나의 (남편) 님은 갔습니다.
('님의 침묵'을 그저 인용한 것일 뿐이라는 점을 분명히 밝히고 싶다. 개인적인 감정과는 전혀 상관없음을 거듭 밝히고 싶다.)
그 양반은 가고 새벽부터 기상하신 아드님과 아직 일어날 기미조차 보이지 않는 딸과 백만 년 전에 일어난 나, 우리 세 멤버만 남았다.
오랫동안 기다려왔어, 내가 원한 남의 '워크숍'이었기에...
한 달 가까이 나를 버티게 해 준 그날이 시작한 날이었다.
너무 기쁜 나머지 나는 그만 새벽 5시에 일어나고 말았다.
소풍 전날 기대감에 잠 못 드는 철없는 어린애도 아니면서.
하긴 이건 소풍에 비할 바가 아니다.
소풍의 몇 배는 더 기대되고 기쁘고 은혜롭기까지 하다.
일단 다음날 오후까지는 자유야.
전 주에 남매를 친정에 1박 2일로 보냈다가 하루 종일 집안일만 하다가 이틀을 날려 버린(?) 전철을 다시 밟지 않기 위해 절치부심했다.(고 나름 또 잔머리를 굴렸다)
이번이 진짜야.
아이들은 내가 낳았으니 감수해야지.
하지만 그 양반은 내가 낳은 것도 아니잖아?
지난번 남매의 '외가행'은 다소 미흡한 점이 없지 않아 있었지.
이번엔 다를 거야.
달라야만 해.
최대한 움직이지 않겠어.
'최소의 움직임으로 최대의 자유시간 확보'
이번 슬로건은 이것으로 정했어!
그래도 자식들 먹이는 건 해야겠지?
이제 아침 8시니까 괜찮아.
이제 막 '모닝스페셜'이 시작했는걸.
조급해하지 않아도 돼.
내겐 시간이 아직 많이 남아 있다고.
괜히 마음이 여유로워지니 새 반찬을 만들고 싶은 욕구가 느닷없이 솟구치는군.
우선 새 밥부터 지어야지.
냉장고를 뒤지자.
우선 야채를 다 꺼내서 나물 몇 가지를 만들어 놓자.
한 끼 정도는 시간을 많이 들여도 괜찮겠지?
한 번은 골고루 먹이고 몇 번은 조금 허술해도 평균을 내면 얼추 세 끼가 골고루 갖춰질 거야(물론 내 생각에만이다).
전날 만든 무생채도 꺼내고 달걀 프라이도 하고 각종 장아찌들이 죽었는지 살았는지 점검할 겸 무조건 다 꺼내 보자.
그래봤자 반찬이 10 가지는 안 넘는군.
일단 이렇게 간단히 아침을 먹자.
어라?
만들고 먹고 설거지하고 나니까 어느새 10시가 넘었네?
'아직도' 괜찮아.
그래봤자 여전히 오전이야.
더 더워지기 전에 시장을 봐야지.
이제 일용할 양식도 확보했으니 다음 단계로 넘어가야겠어.
이왕이면 쾌적한 환경에서 쉬는 게 좋겠지?
얼른 청소를 하고 빨래부터 해야지.
매우 깔끔한 사람은 아니지만 그래도 깔끔한 게 좋은 사람이니까.
그전에 남매에게 각자 가방을 빨게 하는 거야.
참, 세탁기 먼저 돌려야지.
빨래하는 동안 다른 일을 할 수 있으니까 '빨래가 먼저다'.
그 양반은 어차피 밤에 돌아오지 않으니 이참에 다 빨아버려야겠어.
특히 이불 빨래를 집중적으로 하는 거야.
건조기에 돌려도 뭔가 개운하지 않아.
이틀 말린 후에 건조기에 집어넣자.
'Easy Writing'을 들으면서 그럼 이제 본격적으로 가방을 빨아 볼까?
전에 방학 때 가방 빨기 영업 비밀을 전수했는데 남매는 다시 내게 앙코르를 요청했다.
내가 먼저 시범을 보이다가 남매에게 인수인계를 하니 건식으로 쓰는 욕실에 그만 물이 흥건해졌네?
마침 잘 됐다.
이렇게 된 거 욕실 청소해버리자.
물론 계획했던 일은 아니지만 이 정도는 애교로 봐주겠어.
인심 썼다. 저쪽 욕실도 손에 물 묻힌 김에 해치워버리자.
그래봤자 우리 집 욕실이 두 개밖에 더 돼?
역시 청소를 하면 기분이 개운해진단 말이야.
그런데,
맙소시!!!
벌써 오후 2시잖아!
왜 밥을 달라고 안 하는 게지?
영원히 밥 달라는 소리 같은 건 안 했으면 좋겠다.
"너희 '혹시' 배고파?(=지금까지 밥 타령을 하지 않은 것을 보면 그다지 배가 고픈 건 아닌가 보네. 방학 때는 삼시 세끼 꼭 안 챙겨 먹어도 괜찮겠지? 너희 '아점'이라고 알지? 영어로는 브런치. 그러니까 우리 적당한 선에서 합의 보자. 조금 있으면 저녁 먹을 시간인데 좀 더 버텨 줄 수 없겠니? 그런 말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점저' 어때? 점심 겸 저녁 말이야.)
"엄마, 난 유부초밥이 먹고 싶어."
아드님은 언제나 잡수고 싶은 게 많으시다.
"엄마, 까르보나라 떡볶이."
따님은 전날부터 까르보나라 타령을 했었다.
"엄만 만두가 먹고 싶은데."
나는 최대한 시간을 안 들여도 되는 만두가 당겼다.
한 집에서 이렇게 메뉴 통일이 안되어서야 원.
"엄마가 오전부터 일을 많이 했더니 힘들다. 우리 아들 꼭 유부초밥을 먹어야겠어?"
말이나 한 번 해 보자.
"엄마는 하나밖에 없는 아들이 유부초밥이 먹고 싶다는데 안 해 줄 거야?"
어랍쇼!
얘 좀 보게.
"우리 아들은 하나밖에 없는 엄마가 지금 너무 힘들다는데 그것도 이해 못 해줘?"
가만 보면 아들의 저 수법은 지나칠 때가 있다.
그러나 나는
"우리 아들이 뭔가 착각하고 있는 것 같은데 우리 집에서는 다 하나밖에 없어. 엄마, 아빠, 누나, 너. 너만 하나밖에 없는 거 아니야."
라고 유치하게 대꾸하지는 않아다 물론.
그럴 기운도 없었다.
"그럼 내가 만들어서 먹을게, 엄마."
"그래. 네가 먹을 건데 당연히 네가 만들어 먹어야지."
전에 아들이 여러 번 만들어 본 적이 있었고, 다행히 이런 비상사태를 대비해서 준비해 둔 게 있었다.
"합격아, 너도 까르보나라 떡볶이 만들어야지."
셋이 각자 다른 메뉴로 점심을 먹고 또 이왕이면 해야 할 일은 얼른 해치우고 푹 쉬고 싶어서 설거지를 하려고 시계를 보자 어느덧 3시. 말도 안 돼. 난 아직 한 번도 앉아 본 적도 없다고!
슬슬 익숙한 불길함이 밀려들기 시작했다.
데자뷔...
설마?
또?
그래도 아들이 태권도 학원에 갈 시간이니까 조금 낫겠지?
딸이 나를 귀찮게 하지는 않으니까.
'Easy English' 재방송이나 들으면서 집안일을 하자.
매일 해야 할 일을 빼먹으면 안 되겠지?
하다 보면 끝이 나겠지.
그런데, 숨 좀 돌릴까 했더니 어디선가 들려오는 활기 넘치는 초등 4학년에 재학 중이신 남자 어린이의 목소리.
내가 잘못 들은 것일 게야.
"엄마. 나 왔어."
벌써 아드님이 컴백하셨다.
자질구레한 일을 이것저것 하고 한 번 더 세탁기를 돌린 후, 저녁밥이나 차려 볼까 했더니 저녁 7시가 다 되어간다.
"얘들아, 너희 혹시 간헐적 단식할 생각 없어? 오늘 벌써 두 끼는 먹었으니까 저녁 한 끼 정도는 건너 띄어도 괜찮지 않을까?"
라고 진심으로 남매에게 제안하고 싶을 지경이었다. 내 밥 차려 먹기도 귀찮은 마당에.
정신을 차려야 해.
아직 끝나지 않았어.
얼른 또 설거지를 하고 쌀을 씻어 놓고 청소기 한 번 돌리고 그러고 나서 쉬면 될 거야.
이제 거의 막바지야.
8시니까 그래도 아직 희망은 남아 있다고.
그런데 뭔가 석연치 않은 이 기분은 뭐람?
아차차, 고구마 줄기.
김치 담그겠다고 사 둔 게 있었는데 그걸 또 깜빡했네.
살짝 데쳐서 껍질을 벗기면 잘 벗겨진다고 해서 저번에 그렇게 했더니 정말 술술 잘 벗겨졌던 기억이 있어 부랴부랴 씻어서 데쳤다.
"얘들아, 고구마 줄기 껍질 같이 벗기자. 이걸로 김치 만들 건데.(물론 너희가 그다지 좋아하는 김치는 아니지만) 알지? 눈같이 게으른 것이 없고, 손같이 부지런한 것이 없다!"
친정 엄마가 어릴 때부터 노동요처럼 부르던 그 노래를 남매 앞에서 부르며 우리는 (물론 내 착각으로만) 사이좋게 작업에 착수했다.
왜 하필 그 요망한 것을 샀을꼬?
그 김치 먹으면 뭐 하고 안 먹으면 뭐 한다고.
껍질을 다 벗기고 나니 밤 9시다.
절망하기엔 일러.
하지만 이걸로 김치를 담가야 하는걸?
이제 겨우 시작이라고, 이 어리석은 중생아.
그냥 두면 고구마 줄기가 알아서 양념에 비벼지고 반찬통에 들어갈 리는 없잖아?
결국 내가 다 해야 하는 거잖아?
이런!
내가 먹고 싶어서 하는 일이니까 누구를 원망하겠어.
집착이 괴로움을 낳는다더니 틀린 말은 아니었어.
신세한탄할 시간에 어서 양파라도 썰자.
결국 고구마줄기 김치는 완성됐다.
김치는 만드는 황금 시간대는 밤 10시야.
그래, 김치는 자고로 한밤중에 만들어야 제맛이지.
그나저나 이젠 정말 끝인가?
분명히 뭔가 더 있을 거야.
맞다, 딸 수학 문제집 채점을 안 했네.
도대체 수학은 누가 만들어 낸 거고 문제집 따위 누가 만들어 낸 거람?
뭘 더 하라고 해도, 하려고 해도 이젠 못하겠다.
여기까지가 마지노선이다.
해 떨어진 지도 오래고, 벌써 밤 11시가 다 되어 간단 말이다.
이젠 정말 마지막이야. 12시가 되기 전에 오늘 들었던 오디오어학당 표현을 기록해야지.
그나저나 난 언제 쉴 수 있는 거람?
어쩌면 전생에부터 예감했는지도 몰라.
결국엔 이렇게 되리라는 것을.
이런 걸 고급 전문 '영어'로
'I go, my paljaya.(아이고, 내 팔자야)'라고 한다지 아마?
내 이럴 줄 알았다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