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마철만 되면 민원실에서는

"당신이 어떻게 알았어? 이런 것도 다 알아?"
"다른 사람들도 아마 다 알 걸?"
"진짜 대단하다."
"그건 상식이지."
"아무튼 당신 덕분에 해결됐어."
"그러니까 내 말만 잘 들어. (절대 그럴 리는 없겠지만) 내가 하라는 대로만 해."
아니 이 양반이 지금 10년도 넘게 직장생활을 하고 있는 사회인이 맞으신가?
그 속은 나도 모르겠고, 겉보기에는 멀쩡하게 생겨서(이 점도 완전히 동의하지 않지만 일단 멀쩡할 거라고 치자) 프린터에서 문서 한 장 출력을 못하고 계시다니 이게 다 무슨 일인가?
"왜 출력이 안되지? 이상하네."
멀리서도 들리는 안타까운 중얼거림에 나는 출동하지 아니할 수가 없었다.
때는 바야흐로 장마가 절정이던 어느 날 밤이었다.
할 일이 있다던 직장인은 일찌감치 일을 벌였다.
그런데 자꾸 프린터 앞에서 안절부절못하는 거다.
"왜? 또 안돼?"
가급적 그 직장인과 엮이고 싶지 않은 나였지만 옆에서 보고 있자니 답답해서 그만 선을 넘고야 말았다.
"당신 언제 출력한 적 있어?"
"난 저번에도 했지."
"그래? 그럼 고장 아닌데?"
"출력이 안된다고? 안될 리가 없지. 내가 최근에도 몇 번이나 했는데."
"그럼 왜 안되지?"
"껐다가 다시 켜봐."
(부끄럽게도 나의 원초적인 1차 처방전은 저것이 최선이었다. 그리고 놀랍게도 저 나이롱 처방이 빛을 발할 때가 종종 있었다, 전자 제품의 경우에는 말이다.)
"해 봤어. 그런데도 안돼."
('더욱' 부끄럽게도 나나 그 직장인이나 거기서 매한가지였다.)
"그럼 습해서 안되나 보다. 습하면 그러더라."
"습하다고 출력이 안된다고? 그건 아닌 거 같은데?"
(아닌 거 같은지 아닌지는 일단 해 보시고 대꾸할 것이지 불만만 많으신 직장인이다.)
"아마 그럴 가능성이 커. 내가 민원실 있을 때 그런 적 많았다고 했잖아."
"그거랑은 상관없을 거 같은데?"
"한번 해 보고나 말해. 장마철에는 하도 습하니까 종이들이 습해져서 출력이 잘 안 되더라니까. 그래서 우린 민원인 핑계 대고 그나마 에어컨 좀 틀고 살았다니까. 다른 사무실은 더워도 에어컨 잘 안 켰는데 민원실은 하루 종일 출력 해야 하는데 비 올 때 걸핏하면 종이 걸리고 출력도 안되고 그랬었어. 진짜 얼마나 신경질 났는지 몰라.
민원 보다가 무인 발급기에 자꾸 종이 걸려서 시도 때도 없이 불려 가고. 용지도 여러 가지인데 자꾸 인쇄용지가 나오다가 걸려서 장마철에는 그거 처리하는 게 일이었다니까. 근데 그게 아무래도 습해서 그런 것 같더라. 에어컨 잘 틀면 확실히 출력이 잘 됐어."
"그런가?"
"그런가가 아니라 그럴 거야."
"그럼 에어컨 틀어봐야겠다."
하여튼 의심은 많아가지고 내 말만 안 믿는다.
습한 기운이 거의 빠지고 쾌적한 환경으로 바뀌자 프린터는 마구마구 A4 용지를 뱉어내기 시작했다.
"진짜 이제 출력 잘 되네."
"내가 뭐랬어? (나도 완전히 확신하지는 못하지만) 아마 습해서 그랬을 거야."
"아무튼 당신 덕분에 잘 해결됐네. 아무튼 대단하다."
나 같은 전자제품 무식자가 이렇게 엉뚱한 상황에서 추앙(?) 받는 날이 다 오다니.
대단하긴 뭐가 대단하다는 걸까?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면 간단할 것을 그걸 간과한 그 양반이 난 더 대단해 보였다.
"내가 작년에도 알려준 것 같은데? 그때도 아마 장마철이었을걸? 출력 안된다고 그래서 내가 지금처럼 이렇게 가르쳐줬잖아. 기억 안 나?"
"그랬나?"
"그랬나가 아니라 그랬어, 확실히."
난 나한테 불리한 건 미련 없이 과감히 잊어버리지만, 나한테 유리한 건 확실히 기억한다고.
종종 나는 생각한다.
그 양반 직장에서 무사한 걸까?
일은 제대로 하고 사는 걸까?
(물론 내가 걱정할 것도 아니고 이런 내 마음을 알면 그 양반은 콧방귀만 뀌겠지만 말이다.)
항상 물가에 내놓은 어른이 같아서 한 번씩 미심쩍기도 하고, 저런 황당한 상황에서는 화들짝 놀라기까지 한다.
그래도 용하다.
아직까지 무사히(인지는 자도 잘 모르겠지만) 직장 다니고 있으니.
실체를 여태 들키지 않은 것인지 그래도 매달 월급까지 꼬박꼬박 다 받고 오시고.
월급날에는 대견하고 신통방통 했다가 느닷없이 프린터 앞에서 쩔쩔매고 있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나는 그만 헷갈리고 마는 것이다.
저래가지고 직장 생활은 어떻게 하신담?
(물론 당사자는 충만한 자신감으로 일 하나는 잘한다고 큰소리치신다. 그 '일'에 아마도 비 오는 날 문서 출력하기는 제외되었나 보다.)
불현듯 나는 깨달았다.
일 하나는 잘하시는 그 양반은 확실히 일을 잘하긴 할 것이라고.
그것도 매우 화창하고 맑은 날에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