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하지) 않(은) 남매

잔머리만 굴리던 엄마는 결국

그래도 나는 2024. 8. 3. 2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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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이건 자식 없이 하루 살기(를 실패하고 반나절만이라도 혼자 살고 싶은 자의 얼토당토않은 바람)의 연장선이다.
정확히는, 감히 자식 없이 하루 살아보기를 소원하였던 과보를 톡톡히 받고 혼자서만 실컷 일만 하고 보낸 이야기다.
전날 아이들을 친정에 데려다주고 와서 '절대로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겠다'라고 다짐한 일이 무색하게 오후 내내 집안일만 했다.
대강 어느 정도 치우고 정리한 후 문득 정신을 차리고 '이제 슬슬 혼자 쉬어 볼까나'했던 찰나에 남의 자식이 퇴근하고 들이닥치는 바람에 모든 게 무산되었다.
그래, 시행착오는 있을 수도 있어. 하도 이런 기회가 오지 않으니 익숙지 않아서 그래.
그럴 수도 있어.
그건 그렇다 치고, 다음날, 내겐 아직 다음날 오전 (잘하면 오후까지도)이 남아 있어.
이왕 친정에 보내 버린 아이들, 점심은 먹고 데리러 가야지, 어차피 이렇게 된 거 한두 시간 빨리 가면 뭐 하고(하지만 한두 시간 더 빨리 가면 뭐 한다) 한두 시간 더 늦게 가면 뭐 하나(물론 한두 시간 더 늦게 가면 또 뭐 한다, 나만 좋다) 이렇게 다시 합리화하면서 남매를 데리러 가는 시간의 마지노선을 오후 3시에서 5시 사이로 잡았다.
눈치도 없이 나는 다음날, 아이들도 없는데, 내 자식은 없는데, 다 큰 남의 자식 하나만 남은 집에서 새벽 6시가 되기도 전에 눈을 떠버렸다. 왠지 불길하다. 이렇게 빨리 일어나면 안 되는 건데, 적어도 아침 7시에는 일어나 줘야 하는데.
이왕 이렇게 됐으니 또 뭐 할 일이 없나 어슬렁거리기 시작했다.
대궐 같은 집도 아니면서 몇 발짝만 움직여도 일 거리 천지다.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하고 그것도 하고 안 하는 거 없이 다 손을 댔다.
물론 '이왕 일찍 일어난 김에'라는 나름의 합당한 이유는 있었다.
어차피 해야 하는 집안일이라면 얼른 해치우고 나중에 쭉 쉬면 되겠지?(라고 생각한 건 나의 오산이었음은 말할 것도 없었다 물론.)
직장인이 출근하고 나는 다시 다짐을 하고야 말았다.
어차피 아이들이 오면 또 정신없어질 텐데 그들이 오기 전에 치우고 또 정리해 놔야지.
남매가 컴백하면 그때부터 이젠 정말로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말아야지.
계획은 아주 훌륭했다.
하지만, 약속은 깨라고 있는 거라고 한다면, 계획은 무산되라고 있는 건지도 몰랐다.
아주 깔끔한 성격도 아니고 정리정돈을 매우 잘하는 편도 아니지만, 그래도 이것저것 손대다 보면 오전은 금방 지나간다.
순식간에 오전을 보냈은 지나갔다.
그래, 아직 희망은 있어. 점심 먹고 쉴 수 있을 거야.
간단히 점심을 먹었다.
밥 먹는 시간도 아까워(도대체 뭐가 그리 아까울까, 공부할 때도 이렇게 안 살았으면서) 최소한의 양으로 최소한의 메뉴로 시간을 벌었다.
밤 12시가 되면 마법이 풀려 버리는 신데렐라도 이렇게 초조하지는 않을 것이다.
나는 정오 12시를 기점으로 슬슬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곧 아이들을 데리러 가야 하는 시간이 다가옴에 따라 뭔지 모를 불길함이 엄습했다.
이제 내게 남은 자유 시간은 한 시간에서 세 시간 정도.
그것만도 어디냐며 지금부터 본격적으로 쉬면 되는 거라며 딸의 방으로 향하려다가(나는 평소 딸의 방에서 책 보는 걸 매우 좋아한다, 물론 딸이 그렇게 해도 좋다고 했다) 녹색의 뭉텅이들을 발견하고야 말았다. 음침하게 수염까지 매달고 누워있는 방망이 같은 그것들.
참, 전날 친정에서 옥수수를 가져왔었지.
퇴근하면 그 양반과 옥수수 껍질 좀 벗기자고 할 요량으로 챙겨 왔던 일이 그제야 생각났다.
양이 제법 많았다.
하지만 1,000개까지는 아니니까. 그래봤자 100개 정도밖에 더 되겠어?
일단 까자.
다 까고 편히 쉬자.
그러나 볼썽사나운 그 수염이 알알이 박힌 옥수수 사이에 교묘하게 숨어 있어서 그걸 떼어내는 일이 여간 성가시고 시간 걸리는 게 아니었다.
감히 옥수수 껍질 까는 일을 우습게 본  죄, 그 과보를 또 나는 톡톡히 받고야 말았다.
전날 그 양반이 저녁 먹고 쉬었다가 같이 까자고 했지만, 야속하게도 저녁을 잡수시고는 그냥 쭉, 푹 쉬셨다, 다음날 아침까지 물론. 
그래서 그 많은 옥수수가 다 내 차지가 된 것이다.
두 시간 남짓, 거의 세 시간을 혼자서 까고 또 깠다.
옥수수, 보기만 해도 질릴 지경이었다.
입맛이 다 떨어졌다.
그래도 이제 정말 할 일은 다 한 것 같고, 급한 불은 다 껐으니까 좀 쉬어 볼까나?
뒷정리도 만만치 않았다.
이 정도면 됐다고 만족하고 본격적으로 휴식 모드로 들어가려는 찰나, 나는 한통의 전화를 받기에 이른다.
마치 저승에서 걸려 오는 듯한 전화 한 통.
"엄마, 언제 올 거야? 빨리 와! 얼른 집에 가자."
다른 때 같으면 제발 집에 가자고 가자고 해도 10분만, 30분만 이러면서 외가를 떠나기 싫어하더니 왜 갑자기 이러는 거지?
결국 나는 바로 집을 나섰다.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손해(?) 봤다.
내가 어리석었다.
잔머리 굴린 과보를 이렇게 받는구나.
첫날 아이들을 데려다주고 오는 데 1시간, 다음날 다시 같은 행동을 하는 데 또 한 시간, 이 무더위에 도대체 뭐 하는 짓이람? 그냥 가만히 집에나 있을 걸. 그럼 최소한 두 시간은 운전 같은 건 하지 않았어도 됐잖아?
'에어컨도 고장 난 차'를 몰고 나는 무얼 바라고 그 짓(?)을 두 번이나 했던가.
아이들만 친정에 보내고 자유부인으로 거듭나려던 (다소 불순한) 나의 계획은 애초에 무모한 도전이었다.

남매를 ㅁ데리고 오자마자 또 나는 바로 저녁 준비를 할 수밖에,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그것 말고는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