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 살아보기, 자식 없이

하루 종일 밖에도 안 나가고 책이나 실컷 봐야지.
배가 고플 때까지는 일어나지도 않고 먹고 나도 바로 설거지 같은 건 하지 말고 쌓아 놔야지.
청소고 뭐고 그냥 널브러져서 아무것도 손대지 말아야지.
1분 1초가 아까우니 전화도 받지 말아야지.
정말 정말 진짜로 아무것도 안 하고 하고 싶은 것만 해야지.
아무것에도 방해받지 말아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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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랬다, 당초 내 계획은.
제주도까지는 바라지도 않는다.
한 달까지는 바라지도 않는다.
집 밖에 안 나가도 상관없다.
혼자 살아보고 싶다.
아니, 혼자 사는 것까지는 현실적으로 아직은 불가능하니 그냥 나 혼자만 있고 싶었다.
"출근도 안 하고 맨날 혼자 있으면서 왜 걸핏하면 혼자 있고 싶다고 그래?"
라고 우리 집 직장인은 이해 못 하지만, 그러고 싶을 때가 있는 거니까.
하긴, 퇴근 후면 거의 혼자 있다시피 하는 그 직장인은 이런 내 기분을 잘 모를 테지, 알고 싶어 하지도 않을 테고.
어쨌거나 나도 혼자 있고 싶었다, 단 하루라도. 이틀이면 좋겠지만, 일주일이면 고맙겠지만, 한 달이면 이 은혜 평생 잊지 않겠지만, 일단은 하루라도 말이다.
"엄마, 애들이 가서 자고 싶다는데 가도 돼?"
방학 전부터 남매는 외가에 가서 하룻밤 자고 싶다고 노래를 불렀다.
그러면 나야 고맙지.
그래, 적극 장려할 만한 사항이야.
안 가서 걱정이지 가기만 해 준다면야 나는 언제나 환영이다.
"오라고 해라."
엄마는 흔쾌히 외손주들의 방문을 허락했다.
내 집이 아니니 주인의 허락이 있어야 가능한 일이었다.
게다가 지금은 여름이 아니던가.
오는 손님 반갑고 가는 손님 더 반갑다는 그 계절 말이다.
엄마의 허락이 떨어진 후로 나는 그날만을 기다려왔다.
드디어 내게도 혼자 있을 수 있는 시간이 생기는구나.
남매를 낳은 이후로 잘하면 일 년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한 기회였다.
만에 하나 엄마가
"날도 더운데 뭐 하러 보내려고 그러냐?"
라고 거부의 의사를 밝힐까 봐 진심으로 얼마나 조마조마했는지 모른다.
그러면서도 살짝 미안한 마음은 있었다.
나 편하자고 엄마를 귀찮게 하는 건 아닌가 싶어서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애써 그 말을 떠올리며 남매가 외가에 가야만 하는 이유를 합리화하기 시작했다.
"애기들 한번 데리고 와라. 왜 너 혼자만 왔냐. 나중에 방학하면 와서 자고 가라고 해라."
라는 엄마의 말씀을 절대 절대 잊지 않고 가슴 깊이 새기고 있었던 거다.
내가 무조건 남매를 외가에 '보내버리려는' 것은 결코 아니다.
다만 엄마의 요청이 있었고, 나도 그를 수락했으며 당사자인 남매도 적극 찬성해서 이 거사가 이뤄진 것뿐이다.(라고 나는 끝까지 합리화하고 있는 중이었다.)
아이들이 중간에 마음을 바꿀까 봐 비위도 살살 맞춰가면서 무사히 대망의 그날까지 왔다.
"얘들아, 할머니 할아버지 말씀 잘 듣고 있어. 알았지?"
말귀는 알아듣는 아이들이니까 어련히 잘 알아서 하겠지.
그런데, 내가 친정집을 떠나려는 찰나 나를 붙드는 아들의 말씀이 있었으니,
"엄마, 지금 갈 거야? 나도 그냥 집에 갈까?"
아니, 이게 무슨 마른하늘에 날벼락 치고 우박 떨어지는 소리라더냐!
"너 여기서 자고 싶어 했잖아. 이런 기회 앞으로 없을지도 몰라. 왜 갑자기 간다고 그래? 누나랑 놀고 있어.(=제발, 엄마 따라나서지 말아 줘. 이건 아니잖아. 자고 가기로 했으면 자고 와야지. 온 지 얼마나 됐다고? 반나절도 안 돼서 이러기야?"
난 아들을 친정집에 붙들어 놓을 수만 있다면 무슨 수단을 써서라도 그렇게 하고 싶을 지경이었다.
나만 안 따라나서면 돼.
절대 나를 따라나서면 안 돼.
갑자기 왜 얘가 마음을 바꾼 게지?
"엄마, 너무 더워."
너무 덥다고 집에 가고 싶다니, 이게 무슨 말이라니?
더운 건 우리 집도 마찬가지인 걸.
"더우면 샤워하고 선풍기 바람 쐬면서 가만히 있어. 그러면 안 더워."
"그냥 엄마랑 같이 집에 가면 안 돼?"
안 되지!!!
당연히 안 되지!
안 되고 말고!!!
우리 아들이 잘 나가다가 왜 이러실까?
너희들이 오랜만에 와서 자고 간다고 해서 외할머니, 외할아버지가 얼마나 좋아하셨는데(물론 내 짐작이다), 너희가 가버린다고 하면 얼마나 서운해하시겠어?(물론 나만 그렇게 믿고 싶은 거고, 그게 사실인지는 확인된 바 없다.)
"벌써 집에 간다고 하면 어떡해? 자기로 하고 온 거 아니야? 오늘은 일단 자자.(=제발, 자자. 자야 돼)"
나는 거의 아들에게 애원하다시피 했다.
"덥단 말이야."
"움직이지 말고 있으면 되잖아."
이런!
아들이 사족을 못쓰는 그 과자를 몇 개 집어 왔었어야 했는데 내 불찰이다.
그것만 있었어도 어떻게 해 볼 수 있는 건데.
친정집에 가는 길에 아이스크림을 하나씩 입에 물려주며 일단 가는 데까지는 성공했는데...
미끼가 벌써 약발이 다 한 건가?
이를 어쩐다?
내 예상 시나리오에 이런 상황은 없었다.
"덥냐? 에어컨 틀어야겠다."
때마침 이 광경을 보시던 엄마가 특단의 조치를 내리셨다.
휴, 다행이다.
이젠 가도 되겠어, 나 혼자만.
"할머니가 에어컨 틀어 주신대. 그럼 금방 시원해질 거야."
"에어컨 틀 거야?"
"응. 샤워하고 나오면 이제 시원하겠다."
에어컨으로 겨우 극적 타결을 마치고 나는 홀가분하게 친정집을 나왔다.
그런데 출발한 지 1분 도 채 안돼 딸에게 전화가 왔다.
가슴이 철렁했다.
"엄마, 우리만 두고 가면 어떡해? 얼른 되돌아와요!"
라는 말이라도 딸 입에서 나올까 봐 무서웠다.(진심으로 나는 그런 말을 들을까 봐 두려웠다)
"엄마, 왜 우리 옷을 윗옷만 챙기고 바지는 안 챙겼어?"
전혀 예상치 못한 말이었다.
최대한 빨리 남매를 데려다 주려다가 바지는 챙기지도 않았나 보다.
"할머니 집에 예전에 입던 바지 있을 거야. 아무 거나 입어, 그냥."
"알았어."
다급하게 전화를 끊고 무사히 집에 도착했다.
오전 10시에 집을 나섰다가 돌아오니 오후 4시가 다 되었다.
어라?
내 계획은 이게 아니었는데?
12시 전에 집에 컴백할 생각이었는데?
아침에 최대한 일찍 아이들을 데리고 나가려고 몸만 쏙 빠져나간 거실이 어수선했다.
하지만 나는 이제부터 생존에 필요한 일 이외에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기로 '작정'했으니까 아무것도 하지 말아야지.
그랬지만...
일단 청소를 했다.
아이들이 없는 틈에 이불도 전부 다 돌렸다.
욕실 청소도 했다.
설거지도 했다.
딸 방도 살짝 치웠다.
화분에 물도 줬다.
씻고, 정신을 차리고 나는 드디어 중대한 결심을 하기에 이르렀다.
'아, 이제 좀 쉬어야지!'
시간은 벌써 저녁 6시 30분을 향해 가고 있었다.
이 얼마 만에 누려보는 혼자만의 시간인가!
이젠 정말 난 자유야!
그때였다.
띠리리띠리리릭 띡띡.
아뿔싸!
내 친자식들은 친정집으로 보내는 데 성공했지만, 남의 자식은 퇴근 시간이 되면 어김없이 집으로 컴백한다는 사실을 간과하고 말았다, 나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