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하지) 않(은) 남매

방학 했으니까 개학 준비도 해야지

그래도 나는 2024. 7. 29. 2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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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개학이 얼마 안 남았네. 너희 학교 갈 준비 해야겠다."
"엄마 무슨 소리야? 방학 한지 얼마 되지도 안았는데?"
"준비물도 챙기고 가방부터 싸 놔야겠다."
"개학하려면 아직 멀었다니까?"
"너희가 뭔가 착각하고 있는 것 같은데 개학이 벌써 다다다음주야. 알고 있지?"
"엄마, 이건 너무 심하다."
 
너희가 아무리 심하다고 해도 내가 안 심하다고 느끼니까 안 심한 걸로 치자.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다고.
하루라도 빨리 진도를 나가야 한다고.
지금 우리 집 두 어린이의 행태로 보아 지금부터 개학 준비에 돌입하지 않으면 개학날 차질이 생길 것 같았다.(고 나만 조바심이 나서 재촉하기 시작한 거였다)
멀면 멀수록 좋은 것은 방학하는 날,
가까우면 가까울수록 좋은 것은 개학하는 날.
어디까지나 지극히 엄마 입장에서 보자면 말이다.
이게 무슨 해괴망측한 소리냐고 우리 집 두 어린이들은 반발할 게 분명하지만 원래 준비는 미리미리 해 두는 게 좋은 거니까 아이들에게 해로울 것은 전혀 없다.(고 또 나만 주장하고 있다)
별 탈 없이 지나간 일주일, 아이들은 여유로움을 얻었고 나는 몸살을 얻었다, 벌써부터.
물론 내가 계획한 여름 방학 생활은 아직 시작도 안 한 셈인데 말이다.
남매가 심심해할 틈도 없이 각종 체험활동에 참여하게 해야지.
어차피 전에 몇 번씩 다 해 본 일들이라 이 정도면 식은 죽 먹기다.
하지만 요즘 들어 남매는 그 식은 죽 따위 먹고 싶어 하지도 않는다는 걸 안타깝지만 느끼고 있는 중이다.
식은 죽 말고 다른 걸 원하기 시작했다.
식성이 바뀌고 있다.
큰일이다. 아주 어릴 때는 내가 하는 모든 일에 간섭을 하며 직접 다 해보고 싶어 하더니 이젠 다른 세계에 눈을 뜨기 시작했고 내가 권하는 (나중에 피가 되고 살이 될) 오만가지 집안일에 대해 시큰둥하게 반응하기 일쑤다.
하지만 여기서 멈추어서는 아니 된다.
어린이가 공부는 안 하더라도 반드시 해야만 하는 일이 있다.
특히 우리 집에서는 필수 교양 과목이 있단 말이다.
 
"얘들아, 너희 혹시 바빠?"
"왜?"
"엄마가 표고버섯을 말려 두려고 하는데 이 정도는 너희가 썰어 줄 수 있겠지?"
"응, 언제 할 거야? 할 때 불러."
딸은 예상대로 흔쾌히 수락했고,
"그 정도는 당연히 하지. 근데 나는 버섯 안 먹을 건데."
수락은 하였으되 뭔가 미지근한 반응을 보였던 이는 아들이었다.
"안 먹더라도 일을 같이 할 수 있는 거 아니겠어?"
"그건 그렇지."
"그럼 손 씻고 누나 불러."
"누나는 배가 아프다고 하니까 내가 누나 몫까지 대신 다 해 줄게."
아드님이 웬일로 아주 적극적으로 나서서 살짝 당황스러웠다.
그래 좋았어.
내가 기대한 게 이런 반응이었어.
"그래. 우리 아들이 누나 생각까지 해주고 고맙네. 우선 버섯 기둥하고 버섯갓을 분리해야 돼. 이렇게 해서 저렇게 해가지고 조렇게 그렇게 하면 돼. 버섯이 크니까 칼질을 5번 정도 해야겠다. 엄마가 먼저 시범을 보일 테니까 잘 보고 따라 해 봐. 나중에 마르면 부피가 더 줄어드니까 조금 크게 썰자. 먹기 전에 이걸 물에 불려서 반찬을 만들 거야. 햇볕에 말려서 먹으면 비타민 D도 더 많아져서 좋대. 또 말리면 보관도 오래 할 수 있고. 알겠지?"
표고버섯 하나에 과학, 수학, 실과, 도덕 과목을 접목하였고, 결정적으로 협동심과 자신감, 미래예측능력까지 골고루 동원한 '엄마 마음대로' 체험활동 시간이었다.
오늘은 가볍게 표고버섯을 손질하고 썰어서 말리는 정도로 물꼬를 텄으니 내친김에 다 해 보자. 시작은 표고버섯이었으나 끝은 고구마줄기 김치 담그기가 되리라.
남매가 더 크기 전에, 아직 내 말이 먹힐 때 더 많이, 더 다양하게.

 
개학하기 전에 얼른 고구마 줄기 벗기자고 해야지.
개학하기 전에 얼른 자몽청 만들자고 해야지.
개학하기 전에 얼른  배추김치 담그자고 해야지.
개학하기 전에 얼른  방충망 청소하자고 해야지.
개학하기 전에 얼른 바질 옮겨심기 하자고 해야지.
개학하기 전에 얼른  산세베리아 꺾꽂이 하자고 해야지.
개학하기 전에 얼른 빗자루부터 시작해 애벌 물걸레 청소부터 스팀 물걸레 청소까지 원 없이 해보자고 해야지.
그나저나, 저렇게 하자면 여름 방학이 금세 끝나 버릴 것만 같다.
괜찮다.
개학하고 나면 못 끝낸 것들은 얼른 올 겨울 방학 기간으로 이월해야지.
 
그러나,
아직도,
그러나 여전히 뭔가 빠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