까면 다 나와
"열 개야 열 개!"
"어디 어디?"
"봐봐."
"에이, 뭐야, 아홉 개잖아."
그날은, 그러니까 불금이었다.
불(시에) 금(방 끝낼 소일거리를 해치우는 날)
"합격아, 혹시 너 바빠?"
"아니, 별로. 왜?"
"엄마가 완두콩 가져왔는데. 너 콩 까는 거 좋아하잖아. 5킬로 정도밖에 안돼."
"내가 좀 좋아하지."
"이따가 할 일 다 하고 콩 좀 까 줄 수 있어?"
"그럼!"
"그래. 고마워."
"엄마, 그런 건 당연히 해야지."
일단 딸은 쉽게 넘어왔다.
이번엔 아들 차례다.
"우리 아들, 바빠?"
"왜?"
"이따가 누나랑 완두콩 좀 깔 시간이 있을까?"
"엄마가 원한다면."
"당연히 원하지. 할 일 다 하고 쉬었다가 콩 좀 까줘."
"알았어요."
"그래. 고마워. 우리 아들. 콩 안 까고 놀고 싶을 수도 있을 텐데 말이야."
아들도 순식간에 넘어왔다.
암만, 고기도 먹어 본 놈(?)이 잘 먹는다고 자고로 완두콩도 까 본 놈들이 자~알 깐다.(고 나만 믿는다)
"열 개짜리 발견하면 엄마한테 알려줘!"
"아홉 깨짜리는 있는데 열 개짜리는 찾기 힘들어."
"그래도 있을 수 있잖아. 작년에도 하나 있었잖아."
"알았어. 찾아볼게요."
친정에서 완두콩을 한 보따리 따와서 친구에게 잔뜩 나눠주고 아이들에게 '완두콩 까기 체험학습'을 은근히 떠넘긴 날이었다.
"작년에는 한 콩깍지에 콩이 열 개 들어 있는 게 있었는데."
"그러게, 이번에도 있을지 몰라. 한번 까 보자."
아들과 딸은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아닌 밤중에 완두콩'이었다.
일은 일이지만, 엄연히 따지면 일이라고 해야 맞겠지만 나는 일도 일이 아닌 것처럼 교묘하게 둘러대는 재주(?)가 좀 있다.(고 또 나만 생각한다)
"얘들아, 과연 이 콩깍지에 완두콩이 몇 개나 들어있을까? 이거 맞히기 게임해 보자, 어때?"
시작은 미약했다.
어린것들에게(당시에는 아마 딸은 다섯 살, 아들은 세 살 정도 먹었을 것이다, 딸은 이미 세 살 때부터 저런 일에 길들여져 있었다.) 저런 수법(?)으로 접근했던 게 시작이었다.
"엄마, 나 해 볼래."
딸이 먼저 적극적으로 동참의사를 표시했다.
"그게 뭔데, 엄마?"
아들은 언제나 원 플러스 원이었다.
누나가 하는 거라면 뭐든지, 좋은 건지 나쁜 건지도 모르고(하지만 나는 남매에게 나쁜 건 결코 시킨 기억이 없다) 일단 본인도 나서고 본다.
말이 좋아 콩깍지에 든 완두콩 개수 알아맞히기지 실상은 콩 까는 '일'을 시킨 거였다.
'게임'이라고 쓰고, '소일거리'라 읽는다, 정도랄까?
혹은 '소근육 발달 장려 활동' 내지는 '먹을거리 체험학습'이 정도로 해 두자.
"엄마, 열 개야, 열 개!"
아들이 환호하며 내게 달려들었다.
과연 콩깍지 안에는 완두콩이 열 개나 알알이 박혀 있었다.
그 어느 때보다도 아들은 기쁨에 넘쳤다.
반면 딸은 아무리 까고 까도 최대가 아홉 개라는 사실에 약간 풀 죽은 듯 보였다.
"합격아, 너도 열개까지 찾을 수 있을 거야. 분발해 봐."
라면서 나는 그날 밤 남매를 독려하고 또 독려하였다.
나란히 사이좋게 붙은 완두콩이 꼭 내 딸과 아들 같아서 대견하게 바라보는 사이, 눈 깜짝할 사이에 남매는 콩깍지 째 쪄 먹을 양을 몇 줌만 남기고 다 까버렸다.
임무를 완수한 딸은 그날도 외할머니의 명언을 읊었다.
"벌써 다했네.역시, 눈같이 게으른 게 없고, 손같이 부지런한 게 없다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