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하지) 않(은) 남매

보리수 열매 아래서 깨달았다.

그래도 나는 2023. 6. 19. 15: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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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여기까지 힘들게 온 보람이 없잖아!"

아들이 있는 대로 투덜댔다. 

"엄마도 이럴 줄 몰랐지.

죄인은 그 말 밖에 달리 할 말도 없었다.

"엄마는 왜 우릴 데려와가지고..."

딸도 기어이 한 마디 했다.

"같이 딸 수 있을 줄 알았지."

사전조사를 철저히 하지 못한 엄마는 끝내 남매로부터 원성의 말을 듣고야 만 것이다.

 

곧 장마가 시작될 것이다.

올해는 다른 해보다 장마가 좀 늦는 것 같다.

지긋지긋한 장마가 할퀴고 가기 전에 보리수 열매를 따야겠다고 마음먹은 지 2주가 넘었다.

하필이면 보리수 열매는 꼭 장마철에 절정으로 익어간다.

그래서 운이 좋아야 한 줌이라도 건질 수 있다.

친정이 한창 농번기라 정말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한가하게 보리수 열매나 따고 있을 정신도 없었다.

마트에 갔다가 판매용으로 나온 보리수 열매를 보고 

'저거 집에 가면 공짜로 실컷 질리게 따 먹을 수 있는 건데.'

이러면서 콧방귀까지 다 뀌었지만 결정적으로 시간이 없었다.

무직자가 시간이 없다니 말도 안 된다며 남들은 믿을 수 없어 하지만 사실이 그렇다.

출근만 안 하지 다른 많은 일들을 하고 있다.

공짜는 공짜지만 가만히 입 벌리고 누워 있으면 알아서 열매가 입으로 쏙 들어갈 리는 없다.

어리석은 중생은 가격은 지불하지 않지만 땡볕 아래서 약간의(성가실 수도 있는) 신체활동을 요한다는 점을 간과하고 말았다.

 

"애기들은 데리고 가지 말고 너만 혼자 따라. 독사 나온다. 애기들 물리믄 큰일이여. 운동화 신고 가지 말고 장화 신고 가라."

친정 엄마, 그러니까 나의 생물학적 친엄마는 말씀하셨다.

애기들, 그러니까 엄마의 손주들은 독사 물리면 큰일이고 친딸인 나는 독사 물리면 작은 일인가?

엄마의 말씀에, 그냥 뱀도 아니고 '독사'라는 단어에 순간 나도 주춤했다.

하지만 어리석은 중생은 또 저걸 양껏 따다가 에이드도 만들어 먹고 여기저기 나눠 줄 욕심에 눈멀고 귀 멀어버렸다.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 그 세 가지 중 여전히 어느 것 하나도 버리지 못하고 옆에 꼭 끼고 사는 중이다.

"알았어. 애들은 어디 그늘에 가서 있으라고 하고 나 혼자 따면 되지."

살짝 서운한 마음이 들긴 했지만 저걸 다 훑어 버리고 말겠다는 욕심이 서운함을 이겼다.

과자도 주고 아이스크림도 주고 TV도 좀 보게 하고 아이들에게 '보리수 열매 수확 체험활동'에 대한 동기부여 내지는 일정한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선수 치는 사전 행동을 하고 그곳으로 갔다.

그런데, 그곳은 마치 정글 같았다.

심기만 하고 전혀 돌보지 않아 방치되다시피 오랫동안 한 자리만 지키고 있어서 주위에 내 키만 한 풀이며 이름도 모를 억센 나무들로 발을 딛기도 힘들었다.

과연 독사가 좋아할 만한 환경이었다.

자꾸 엄마 말씀이 생각나 집중도 할 수 없었다.

게다가 나무에는 굉장히 센 가시들이 있어서 손가락도 찔렸다.

다 좋은데 보리수나무는 가시 때문에 여간 고약한 게 아니다.

"엄마. 나도 따 볼래!"

내가 하는 건 무조건 다 해봐야 직성이 풀리는 딸이 나섰다.

"합격아, 여기 좀 위험하다. 엄마도 하기 힘들어. 조금만 따고 가야겠다. 너도 봐봐. 따기 힘들겠지?"

엄살이 아니라, 딸을 제지하려는 게 아니라 사실이 그러했다.

"엄마. 그럼 도대체 우리 힘들게 여기까지 왜 온 거야? 보람이 없잖아."

딸은 정작 가만히 있는데 군대를 아직도 안 간 아들이 내게 따지듯 물었다.

하여튼 아들은 '보람'을 정말 좋아해.

아이들하고 같이 따면 재미있어할 줄 알고 데려간 것뿐인데.

나도 의욕을 잃었다.

손이 닿는 아래쪽에서 조금 따고 가지치기도 할 겸 좀 꺾어서 아이들에게 한 가지씩 줬다.

"엄마, 우리 누가 더 씨 멀리 뱉나 시합하고 있어! 내가 누나보다 더 멀리 뱉어!"

좀 전에 나보고 왜 힘들게 데려왔냐고 불만이던 그 아들이 맞나 싶게 신나게 놀고 있었다. 

역시 우리 아들은 뒤끝이 없어.

 

수박씨를 뱉는 시합을 할 때보다도 더 진지하고 재미나게 노는 아이들을 보며 또 나는 깨달았다.

사전 답사를 철저히 하지 않은 체험활동은 원망만을 부른다는 것을.

그리고 남매가 힘들게 그곳까지 간 노고를 씨 멀리 뱉기로 승화시켰다는 것을.

보리수 에이드는 무슨 에이드냐. 생각날 때 사진이나 실컷 봐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