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원면직-일반행정 지방직 아내의 공무원 그만두기
남편은 내 의원면직을 결사반대 하기 위하여
그래도 나는
2023. 5. 14. 1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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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자기가 공무원 아니었더라도 결혼했을 거야. 직업이 없어도 상관없어. 나중에 아이들 낳으면 아이들 잘 기르는 게 돈 버는 거지. 꼭 일해야 되는 건 아니야."
이랬던 남편이었다.
신통방통하기도 하여라.
나도 비슷한 생각이었다.
공무원이라는 직업을 가지게 됐지만 그 직업을 계속 유지하지 못하게 될 피치 못할 사정이 생긴다면 일을 그만두는 것을 심각히 고려해 보자. 고 암묵적 합의가 이루어졌다고 생각했다.(그러나 그건 나만의 착각이었을 뿐)
올해부터 내가 복직을 하고 남편이 육아휴직을 1년 동안 하게 될 것에 대해서 우여곡절이 많았지만 그래도 남편은 자신에게 주어진 육아휴직 기간을 나름 원대한 계획을 세우며 마구 들떴었다.
일만 하고 사는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그 휴직 기간은 육아휴직이든 질병휴직이든, 잠시라도 숨을 고를 수 있는 시간을 갖는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크나큰 위안이다.
"앞으로 살림은 내가 알아서 할 거니까 간섭하지 말아 줘."
내게 야무지게 선언도 한다.
"살림하는 거 그거 간단한 거 아니야, 절대로. 솔직히 걱정은 되지만 내가 걱정한다고 해서 달라질 건 없으니까."
"내가 하는 대로 보고만 있어. 자긴 돈이나 많이 벌어 와."
공무원 월급 빤한데 많이 벌긴 내가 무슨 수로 많이 버냐. 한낱 월급쟁이가.
"어쨌거나 이젠 내가 다 알아서 할 테니까 옆에서 보고만 있어!"
어찌 보고만 있을 수 있으랴. 차마 눈뜨고는 못 볼 지경일 텐데.
이왕 육아휴직 들어간 거 그래, 해 보면 내 마음 알겠지. 내가 원하는 만큼은 절대 만족시키지 못하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지만 그래도 남편이 살림하고 아이들 뒷바라지하면서 느끼는 점이 있으리라. 느끼고 달라지면 그걸로 족하다.
달라지기나 할지도 의문이긴 했다.
그런 기대는 애당초 공무원 수험서 버릴 때 깡그리 다 모아서 같이 버렸다.
복직하자마자 내 건강이 와르르 무너지고 도저히 이대로 출근은 못하겠다 싶었다.
"나 일 그만둘래."
처음 출근을 한 그 주의 금요일 밤 10시가 넘어 퇴근하고 돌아와서 남편에게 건넨 첫마디였다.
지난 몇 년 동안 몇 차례 아프면서 계속 몸이 안 좋아지고 있다는 것을 옆에서 보아와서 누구보다 당시의 내 상태를 잘 알고 있는 사람이 남편이었다.
알고 있을 거란 건 나만의 착각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그게 무슨 말이야? 갑자기 왜 그래? 왜 일을 그만둔다는 거야? 이제 겨우 일주일 지났잖아. 왜 누가 힘들게 해?"
아, 직감적으로 느껴졌다.
나의 의원면직의 길은 험난하겠구나.
"그런 건 전혀 없어. 팀 분위기도 좋고 과장님도 좋으시고."
"근데 왜 이제 겨우 일주일 일하고 그런 말을 해?"
"일주일이고 한 시간이고 며칠 출근했는지가 중요한 게 아니잖아 지금. 내 몸이 이런데."
"그럼 우선 병가를 내봐. 어떻게 그만둔다는 말을 그렇게 쉽게 해? 너무 무책임한 거 아니야? 너무 이기적이란 생각 안 들어?"
신뢰, 믿음, 부부는 그게 있어야 한다고들 했는데.
경험이 없으니 전혀 모르겠다.
아무리 부부라도 결국은 남이고 내 인생은 내 것이니까 남편을 믿고 의지한다기보다 오롯이 나를 의지하며 살아왔던 나였지만 남편의 저 말은 나를 더욱 깊은 수렁으로 밀어 넣었다.
"내가 오죽하면 그만두겠다고 하겠어? 내 몸이 죽겠는데 어쩌면 말을 그렇게 해? 다른 사람은 몰라도 자기가 그렇게 말하면 안 되지."
정말이다. 다른 사람이 뭐라고 무슨 말을 해도 상관없다.
하지만 남편이 그렇게 말해서는 안 되는 거였다, 절대로.
그가 어떤 사람인데.
2011년 1월의 그날을 잊었단 말인가.
나야말로 얘기해 주고 싶다.
그렇게 말하는 거 아니다 정말.
남편은 그렇게 쉽게 말할 수 없는 사람이어야 했다. 적어도 나에게만은.
평소에도 나는 건강이 제일인 사람이다. 그렇게 튼튼한 몸도 아니었거니와.
돈도 명예도 건강을 잃은 사람에게는 다 부질없다. 물론 내가 돈도 명예도 다 가져본 적도 없지마는.
"자기가 지금 몸이 너무 안 좋아서 충동적으로 그렇게 결정한 것 같은데 잘 생각해 봐. 몸이 아프다고 다들 그만두지 않아. 병가를 쓰든 질병휴직을 하든 어떻게든 버텨야지. 거기 어떻게 들어간 덴데 그래? 남들은 들어가고 싶어도 못 들어가고 있다고! 자기 힘들게 고생하면서 공부했던 때를 생각해 봐. 아무래도 몸이 아프니까 제대로 된 판단을 못하고 있는 것 같아. 주말 동안 쉬면서 다시 잘 생각해 봐."
물론 틀린 말은 아니다. 나처럼 몸이 아프다고 다들 직장을 그만두지는 않는다.
어떻게든 버텨 나간다.
주위에서도 그런 경우가 있었다.
요즘은 아픈 사람들이 왜 그렇게도 많은지 모르겠다.
안 아프고 살 수만 있다면 더 이상 소원이 없겠다. 그게 내가 됐든 아는 사람이 됐든, 얼굴도 본 적 없는 남이 됐든 간에.
몸이 안 좋아져서 몇 년 질병휴직을 하고 어느새 복직해서 근무하는 직원들도 곧잘 눈에 띈다.
내 나이 마흔셋, 첫째는 11살, 둘째는 9살.
아직 내가 더 몇 년을 책임져 줘야 할 파닥이는 목숨들이다.
잠시 내가 없는 나머지 가족 3명을 생각해 본다.
아찔하다.
평소 아이들을 예뻐하는 편은 아니었던 나지만 자식을 둘이나 낳고 보니 세상 모든 아이들은 모두 귀한 존재이고 부모로부터 주위로부터 사랑을 듬뿍 받으며 살 권리가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남편은 어른이니까 어떻게든 살아지겠지.
아이들이 걸린다.
아이들은 죄가 없다.
엄마가 되어서야 비로소 깨달았다. 부모 없는 아이, 특히나 엄마가 없는 아이가 세상에서 가장 마음 아프다.
엄마가 없으면 시베리아 벌판에 알몸으로 선 것보다도 더 춥다.
부모가, 엄마가 되어보지 않고선 절대 알 수 없고, 겪어 볼 수 없는 그 기분.
직업이 없어도 경제활동을 안 해도 아이들 잘 키우는 것이야말로 정말 부자가 되는 거라고 말해왔던 남편이 아니었던가.
다 거짓이었나.
저 말을 번복하는 남편이 나쁜가, 아니면 순진하게 곧이곧대로 믿은 내가 어리석은가.
"나 절대 충동적으로 결정한 거 아니야. 그동안 몇 년을 고민했어. 내가 직업을 그만두는 그런 큰일을 아무 생각 없이 결정할 사람이야? 11년 살았으니까 알 거 아니야? 내가 그렇게 경솔하게 행동하는 사람이냐고?"
"알지. 그래도 이건 아닌 것 같아. 우선은 병가를 내고 좀 쉬자. 무조건 그만둬버리면 어떡해. 아무 대책도 없이. 좀 더 필요하면 질병휴직 쓰면 돼. 그러면 몸도 좋아질 거야."
사람 앞일은 정말 모르는 거다.
정말로 알 수 없는 인생.
서른 살에 시작한 공직 생활을 앞으로 당연히 30년간 쭉 할 줄로만 알았지 이런 이변이 생기리라고는.
정말 앞날 장담하는 거 아니더라.
"난 결심 굳혔어. 내가 그동안 얼마나 신중히 생각하고 내린 결정인 줄 알아? 누가 병가 쓰고 질병휴직 쓰는 거 몰라서 그래?"
"아니야. 자긴 지금 뭔가 단단히 착각하고 있어. 앞으로 애들을 커 갈수록 돈도 더 많이 들어갈 텐데 어떻게 키우려고 그래? 나 혼자 벌어서 그게 가능할 것 같아? 외벌이가 얼마나 힘든데 그러냐고. 진짜 자기 무책임하다. 그리고 애들도 다 컸는데 지금 그만두면 자기 뭐할 건데? 무슨 대책이 있어야 할 거 아냐? 난 절대 찬성 못해. 절대 안 돼!"
내가 그만둔다는데 내 직업인데 왜 본인이 반대한다느니 안된다느니 저러는 걸까.
"자긴 죽을 만큼 아파 본 적 있어?"
"......"
남편은 죽을 만큼 아파 본 적이 없는 사람이다.
나도 남편의 태도가 이해는 된다.
그러나 결국에 남편은 아픈 내 걱정을 하는 게 아니라 본인 걱정만 하고 있는 셈이었다.
도대체 누가 누구보고 이기적이라고 하는 건지.
이기적이라고 하든 뭐라 하든 상관없다.
역시나 남편은 남이었다.
나는 내가 지켜야 했다.
그게 옳다.
"그리고 잘 생각해 봐. 자기 공무원 되려고 얼마나 고생하면서 공부했어? 아깝지도 않아? 지금 배부른 소리 하는 거야. 지금도 공무원 시험 붙으려고 새벽부터 독서실에서 하루 종일 공부만 하고 있는 사람들도 수두룩해. 그런 사람들에 비하면 자기는 지금 배부른 소리 하는 거라니까. 어떻게 공부해서 붙은 시험인데 그만둔다는 말을 그렇게 쉽게 해? 솔직히 자기 이러는 거 그런 사람들한테 피해 주는 거야. 알긴 알아? 남들은 못 들어가서 안달인데 공무원 합격해 놓고 그렇게 쉽게 그만둔다고? 알고 보면 자기가 그런 사람들 자리를 뺏은 건지도 몰라. 공무원 하나만 보고 죽을 듯이 공부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데 지금 그 소리야?"
"왜 그렇게만 생각해? 난 그렇게 생각 안 해. 내 자리 한 명 비어서 그 자리에 사람을 한 명 더 뽑을 수도 있는 거잖아. 간절히 공무원 원하는 사람 그 사람이 들어가면 되는 거잖아. 그럼 그 사람한테도 내가 좋은 일 하는 거 아니야? 난 그렇게 생각하는데?"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왜 말이 안 돼? 인원이 줄었으니까 더 뽑을 수도 있지, 누가 알아?"
정말로 나 한 명 나갔다고 한 명을 더 뽑을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정말로 그런 일이 생긴다면 그 사람에겐 내가 좋은 일 하는 셈 아닌가? 좋은 일 하고 나오는 거 아닌가?
공시생 일자리 하나 만들어주고 나오는 건데 세상에 이 얼마나 아름다운 풍경이냔 말이다.
맞다.
물론 공무원 쉽게 된 것은 아니다.
힘들게 공부했다기보다 그저 암울한 공시생 시절을 겪었고, 나이는 점점 들어가서 내 앞날이 불안해 진저리 치는 밤이 많았으며, 공무원 합격한 순간 모든 번뇌에서 해방된 듯한 기쁨을 맛보았고, 그리고......
"그렇게 힘들게 공부해 놓고는 아깝지도 않아?"
하나도 안 아깝다.
아까웠으면 그만 둘 생각도 않고 꾸역꾸역 다녔을 것이다. 감히 의원면직 같은 거 꿈도 못 꿔 봤겠지.
10년 넘게 산 남편이지만 정말 나를 너무도 모른다.
이건 서운함을 넘어서 배신감까지 든다.
남편은, 적어도 남편은 나에게 그렇게 말해서는 안 되는 사람이었다.
"난 하나도 아까워. 그걸 아깝게 생각했으면 내가 이런 결정을 내렸겠어? 자긴 그저 공무원 자리 하나 잃는 거 그것만 아깝고 내 몸 아픈 건 눈에 보이지도 않지? 한낱 지방직 7급 공무원 자리 뭐가 그리 대단해? 내가 도지사를 그만둔다고 해? 대통령을 그만둔다고 해? 그냥 공무원도 많고 많은 직장 중 하나 일뿐인데 뭐가 그리 못마땅한 거야?"
"자기가 말하는 한낱 그 공무원이 어떤 사람한테는 전부일 수도 있어. 그런 생각은 안 해 봤어? 아깝지도 않냐고?"
남편은 뭐 그리 아까운 게 많은 사람일까.
공무원 직업에 대한 구두쇠, 인색하다 정말.
내가 지금 이 상황에서 남 걱정하게 생겼나. 내 코가 석 자인데, 내 앞가림하기도 바쁜데.
언제부터 저렇게 남편이 박애주의자로 변신하셨나, 집 안의 아내는 아랑곳하지 않고 알지도 못하는 독서실의 공시생 걱정을 저렇게 하시다니.
"지금 뭔가 단단히 착각하고 있어. 나중에 분명히 후회할 거야. 내가 지금 이렇게 반대한 걸 고마워할 날이 있을걸? 현실을 직시해. 너무 감정적으로만 생각하지 말라니까."
"알잖아, 난 후회할 거면 아예 시작도 안 한다는 거. 적어도 말이야."
"다른 사람들한테 다 물어봐. 지금 자기가 퇴직한다고 하면 그렇게 하라고 할 사람 한 명도 없을 거야. 다 바보 같은 짓이라고 그럴 거야."
"내가 내 일을 그만두는데 왜 남의 의견을 들어야 해? 내 일이라고 어디까지나!"
"결혼까지 한 사람이, 애들도 있는 사람이 너무 무책임하잖아. 애들 장래도 생각해야지."
엄마 직업으로 애들 키우나?
애들 장래?
그건 아이들이 각자 개척해 가는 거지.
도대체 내가 일 그만두는 거랑 무슨 상관이람.
어쨌거나 남편은 내 의원면직을 저지하기 위한 처절한 몸부림을 했고 나도 만만찮게 저항했다.
"제발 내 입장에서 한 번이라도 생각해 봐. 자기 입장 말고!"
"나라면 절대 그만 안 둬."
기억하겠다.
"난 자기처럼 그렇게 이기적으로 행동하지 않는다고!"
이기적이라니. 일을 그만두면 이기적이란 건가.
"아이들이라도 뒷바라지라도 하면서 건강을 챙기고 살고 싶어. 자긴 안 해봐서 모르겠지만 일하면서 살림하고 애들 키우는 게 보통 일인 줄 알아? 전업주부라고 다 편할 줄 아냐고! 지금 이 몸 상태로는 도저히 무리야. 죽도 밥도 안 된다고. 완벽하지 않겠지만 하나라도 감당할 수 있는 만큼만 하고 살래 이젠."
"자기가 이기적인 사람인 줄 알았지만 이 정도까지인 줄은 정말 몰랐다."
"사람은 누구나 이기적인 거야. 그리고 난 내가 그렇게 이기적이란 생각 안 해. 내가 이기적이라고 자기가 그렇게 느낀 것뿐이지. 그건 어디까지나 자기 생각일 뿐이야. 자기 생각을 마치 진실인 것처럼 얘기하지 마. 이런 상황에서 누구나 다 나보고 이기적이라고 하진 않을 거야. 그리고 필요할 땐 철저히 이기적일 필요가 있어!"
"그래도 이건 아니야. 다시 한번 잘 생각해 봐."
"자기가 아무리 이기적이라 하든 어쩌든 내 마음은 변하지 않아."
"진짜 이기적인 사람이야!"
그 사건을 계기로 내가 느낀 게 있다면 아무리 남편이라도, 가족이라고 해도 당사자인 내가 아닌 이상, 모두 타인일 뿐이라는 것.
남은 절대 내가 될 수 없고, 아무리 내 마음을 이해한다 한들 남의 입장에서 보는 것일 뿐이다.
그래서 나는 더욱 정신을 바짝 차리기로 했다.
(2022. 8. 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