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나의 기쁨=나의 고통

제발 내가 식욕 있을 때

그래도 나는 2024. 2. 29. 2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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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 뭐 먹고 싶은 거 있어? 있으면 골라. 내가 사 줄게."
평소와는 다른 모습이었다.
보통 같았으면,
"우린 이제 외벌이야, 전처럼 살 순 없어."
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으니 느닷없는, 한 오백 년 만의 선심은 나를 어리둥절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어느 때라고 그렇지 않았느냐마는,
나는 여전히,
요즘도,
한결같이,
입맛이 없다.
별로 먹고 싶은 게 없는 사람이다.
안 먹고살 수만 있다면 세상 행복하겠는 사람이다.
하루에 알약 하나만 먹고도 살 수 있다면 더 이상 소원이 없겠다고 바라 마지않는 사람이다.
"꼭 입맛 없을 때만, 먹고 싶은 게 없을 때만 그러더라. 제발 내가 원할 때 먹고 싶다고 할 때 사줘."
그저 생명을 유지하는 정도로만 먹고 있는 요즘인데, 그마저도 귀찮게 느껴질 정도인데(최근 계속 몸이 좋지 않아 먹는 일도 정말 일처럼 느껴졌다) 하필이면 지금?
하긴 지금이 바로 그 양반에게는 황금시간대(?) 일지도 모르겠다.
본인은 있는 대로 선심 다 쓰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필이면 내가 지금 입맛이 없다고 하니 마침 잘된(?) 그런 상황 같은 거 말이다.
마치 내가 아무것도 안 먹겠다고 할 줄 알고 아무 말이나 던져 본 것 같은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그 양반은 좀 그런 식이다.
느닷없이 점심시간에 부랴부랴 집으로 달려와(그의 근무지는 집에서 차로 달랑 5분 거리, 내겐 치명적이다) 나를 닦달하기 시작한다.
"얼른 나가자. 당신 짬뽕 먹고 싶다고 했지? 내가 사 줄게."
다짜고짜 기원전 5,000년 경에 한 말은 두고두고 묵히고 삭히고 발효시켰다가 이제 와서 느닷없이 사람을 닦달하는 건 또 무슨 경우란 말인가.
"나 먹고 싶은 게 있는데."
라고 백만 년 만에 한 번 저런 말을 하면 돌아오는 대답은
"임신도 안 했잖아. 갑자기 왜 그런 게 먹고 싶어?"
그 양반에게는 세상에 두 부류의 여자가 있다.
임신한 여자와 임신도 안 했으면서 음식타령을 하는 여자.
 
정말 뜬금없이 그 양반이 내게 선심을 쓰는데 난 아직 마음의 준비가 안되었다.
결정적으로 그 양반과 동반으로 점심씩이나 먹으러 나갈 생각이 없다.
어떤 음식이 먹고 싶다고 했지, '같이 가서 먹고 싶다'고는 한 적이 없다.
그런데 또 혼자 오해를 하고 그만...
"당신 혼자 점심 먹으니까 내가 특별히 왔지."
라며 생색이란 생색은 다 내는 일도 예사다.
차라리 안 오는 게, 나를 혼자 두는 게 나를 위한 거라는 걸 정녕 모른단 말인가?
특별히, 그냥, 아니 온 듯 가셔라, 제발.
"비도 오는데 내가 밥 사줄게. 뭐 먹고 싶어? 당신 이런 날 좋아하잖아, 비 오는 거."
이 양반아, 비 오는 건 좋아하지만 댁이 오는 건 반갑지가 않다고.
비만 와야지, 댁이 오면 안 되지.
그리고 집에서 비 오는 걸 보는 게 좋지 그런 날 굳이 밖에 나가서 비 맞아가며 배회하고 싶지도 않다고.
어쩜 13년째 사는데 그거 하나도 여태 모를까.
대 놓고 알려줘도 저렇게 모를 수가 있나?
내가 비 오는 걸 좋아하지 누구를 좋아하는 건 아니잖아?
"당신이 저번에 추어탕 먹고 싶다고 했지? 내가 또 사줘야지."
나는 평소에 식욕이 그렇게 있는 편이 아니다.
아마도 그걸 노리는 게 아닌가 싶다.
강력히 의심된다.
"그렇게 사주고 싶으면 내가 먹고 싶다고 할 때, 나가고 싶다고 할 때 그때 바로 사줘. 말할 때는 콧방귀도 안 뀌고 느닷없이 와서 사람 닦달하지 좀 말고!"
안 맞아도 안 맞아도 어쩜 이렇게 안 맞을까?
정말 마음이 있다면 내가 원하는 그 시간에 그 메뉴로 사주는 게 그렇게 어려운가?
내가 일 년에 입맛 있을 때가 며칠이나 된다고?
그렇다고 금으로 코팅한 쌀밥을 먹고 싶다고 하기를 하나, 다이아몬드를 박은 음식을 먹고 싶다고 하기를 하나?
내가 원할 때는 본인이 당장 귀찮다고 꿈쩍도 안 하면서 무슨 바람이 들었는지 갑자기 쳐들어와서 전생에 먹고 싶다고 입 한번 뻥끗한 그 메뉴를 사 내겠다고 저리 생색인지...
이쯤에서 또 유치하지만 임신했을 때를 끄집어내야 하나?
아무리 생각해도 '날로' 임신부 남편 노릇한 것 같은데.
평소에도 입맛이 없는데 미친 듯이 입덧하던 그때 설마 먹고 싶은 게 있을라고?


이렇게나 아내를 끔찍하게 생각하는 양반,
정말 끔찍하다 끔찍해.
어쩜 그 타이밍 한 번을 못 맞춘담?
견우와 직녀도 일 년에 한 번은 만나는데, 상사화도 아니고 어쩜 내가 식욕 있을 때와 그 양반이 사주고 싶은 그때가 이리도 안 맞담?
그나저나 그 알약은 언제쯤이나 나오려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