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나의 기쁨=나의 고통

흡연남과 담배녀

그래도 나는 2023. 9. 4. 1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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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접까지 끝나면 뭐하고 살 거예요? 저도 국가직 합격자 발표날까지 시간이 많아서 고민되네요."

 

나는 분명 시골 농가 단독 주택에 살고 있는데 매월 아파트 관리비 고지서가 날아오듯 정기적으로 그는 문자를 보내왔다.

"이젠 면접도 다 봤고 더는 바쁜 일도 없는데 한 번 만나는 게 어때요?"

그거야 댁 사정이시고요.

본인이 한가하시다고 남들도 다 한가한 거 아닙니다.

"면접은 끝났지만 우리 집은 지금 한창 농번기예요. 다음에 담배 농사 다 끝나고 한가해지면 그때 생각해 보죠."

아무리 농촌 물정 몰라도 그렇지 내가 그동안 그렇게 얘기했는데 내 말을 도대체 어디로 들은겨?

"거리가 먼 것도 아닌데 잠깐은 시간 낼 수 있잖아요."

언어영역 듣기 평가 능력이 상당히 뒤떨어지는 것 같다.

나중에 민원인하고 대화라는 게 되려나?

거리 때문이 아니라 우리 집 사정 때문이라잖아. 여긴 미친 듯이 바쁘다고.

"잠깐이라도 여기서 나가면 하루가 일손 빠지는 거예요."

지금 농촌 인력난이 얼마나 심각한지는 알고 하는 말이오 이 양반아?

 

기억력이란 게 있는 만물의 영장이라면 우리 집은 교통이 아주 불편한 곳이라고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얘기한 거 한 번쯤은 기억해 내야 하는 거 아닌가? 나는 그 동해물과 백두산이 아직 다 마르지 않았음을 탓할 수밖에 없었다.

고작 하루에 서 너 번 정도만 군내버스가 행차하시는 곳에 사는 사람이 이 사람이라고요.

우리 동네에는 '점방' 하나도 없다니까 그러시네.

댁은 버스 노선도 여러 개고 번호가 매겨져야 할 만큼 많은 시민의 발이 되어주는 시내버스가 흔하게 돌아다니고 '환승씩이나 되는' 도시에 산다지만 나는 한 대의 군내버스가 저기 끝까지 가서 다시 되돌아오는 그런 숙명을 지닌 교통수단을 이용하고 사는 사람이라오.

2022년 'N 잡러' 보다도 더 핫했던 게 2009년의 군내버스 'N노선러'였다는 걸 광역시민이 알 턱이 없지.

군민의 발은 번호가 없는 대신 시간 맞춰 행선지를 그때그때 갈아 끼워요. 베스트 드라이버께서 깜빡하고 직전 행선지를 바꾸지 않고 그대로 끼운 채 반대방향으로 떠나 버릴 때의 그 황당함, 알기나 하우?

그는 하루에 서 너 대 밖에 드나들지 않는 우리 동네 자체를 신기해했다.

무슨 재미있는 구경거리라도 되는 양.

 

광역시에 산다고 지금 내 앞에서 위화감 조성하는 거야?

농촌 거주 장수생에게(어디까지나 나에게만) 펜트 하우스만큼이나 호화스러운 주거지인 고시원에서 좀 살아봤다고 유세 떠는 거냐고요.

이거 왜 이래? 농업이 생명이라고 했어 이 사람아!

 

30년 인생 동안 우담바라 꽃처럼 나의 현실세계에선 좀처럼 일어날 법하지 않았던, 동경해 마지않았던 고시원 생활을 앞세워 나의 호기심을 조장하려는 심산인 겐가?

가만, 저번에 담배를 태우신다고 얼핏 들은 것 같은데?

이거 알만한 사람이 왜 이러시나?

쪽지 저 편의 흡연자여, 새겨들을 지어다.

내가 지금 부모님을 도와서 바짝 담배 수확을 하지 않으면 전국의 애연가들이 심히 불안에 떨며 초조해하게 될 것이야. 물량 수급에 큰 차질을 빚게 될 거라고. 지금 마저 박차를 가해야 초겨울 담배 수매에 제 때 낼 수가 있다네.

원활한 공산품 담배 원료의 수급을 위해서는 잠시도 소홀히 할 수가 없단 말씀이죠.

 

난 사사로운 감정에 얽매이지 않아, 공은 공이고 사는 사야, 아무렴.

아무리 당신이 하루에 서 너 갑의 담배를 소비함으로써 글로벌 담배기업 'KT&G'의 발전에 이바지하고 담배 농가의 소득 증진에 기여를 한다고 해도 난 흔들리지 않겠어.

담배 농사도 다 때가 있는 법이야. 베짱이 기타나 튕기듯이 대충 시늉만 하는 거 아니라고, 감히 농사일이란 것은.

"그래도 그렇게 농사일만 하지 말고 바람도 좀 쐴 겸 한 번 나와요. 기분전환도 하게."

누구를 위한 기분전환이람?

어디서 본 적도 없는 남의 기분을 전환하겠다는 거지?

내가 일하고 싶을 때 일하고 내가 쉬고 싶을 때 쉴 거라네.

"그래도 이렇게 더운 날 부모님만 힘들게 일하시는데 어떻게 그래요? 직장 생활하는 것도 아니고, 집에 있을 때라도 도와드려야죠."

 

이렇게까지 말했으면, 보통의 상식이 있는 성인이면 무슨 말인지 알아 들었겠다. 나 같으면 말이다.

국가직 공무원 시험 합격은 떼어놓은 당상이라며?

큰일 났다.

어느 부서로 떨어질지 모르겠지만 심히 걱정된다.

그 사회생활 원만하지 않을 것 같다.

"하루 정도는 괜찮을 것 같은데 정말 안 되겠어요?"

안된다.

은근슬쩍 얼굴 한 번 보려는 그 꿍꿍이에 나의 의지 또한 흥선 대원군의 척화비 못지않았다.

외간 남자의 일방적인 대면 교섭권을 단호하게 물리쳤다고 생각했다, 적어도 몇 주 후 외세의 압력에 굴복하기 전까지는.

 

담배 농사 막바지는 한창 무더위가 절정일 때 마지막이 가장 일이 많고 힘들기도 하다.

부모님과 가장 오래 같이 산 자식의 '거주자병'이라고 하면 이해가 되려나?

한 집에 살면서 눈으로 보고 돕지 않을 수 없는 현실이 바로 그것이다.

시골 어른들에게 자식들이

"이젠 연세도 있으신데 농사 그만 지으시고 편히 사세요."

라고 얘기하면

"어떻게 눈으로 보고 가만히 있냐?"

라고 대꾸하는 모습 그대로 대입해 보면 쉽다.

자식 된 도리로서 나가는 직장도 없는 마당에 부모님이 힘들게 농사지으시는 걸 보고 차마 군내버스 첫 차를 타고 외간 남자를 만나러 갈 수는 없었다.

그리고 농사라는 게 정말 때가 있는 것이라서 그 시기를 놓치면 여태 힘들게 일궈놓은 것을 망치는 것은 순식간일 때도 있었고 꼭 그 시기여야만 하는 법도 있다. 이래서 '농사나 짓는다'는 것은 참으로 농사에 무지한 사람들의 무책임한 발상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다른 건 다 모르겠고 그는 '농사일만은 절대(라고 생각할 만큼)' 하기 어려울 것 같았다.

어쨌거나 나는 6월엔가 지방직 면접까지 끝냈고, 그보다 먼저 그 쪽지남도 면접까지 다 끝내고 자꾸만 나를 만나 보고 싶다고 문자를 보냈다.

손가락을 자주 움직이면 치매 예방에도 좋다더니, 유아기 때 소근육 활동을 소홀히 한 다 큰 어른이 이제서라도  소근육을 발달시켜 보겠다는 것일까. 그렇지 않고서야 부단한 소근육 활동의 결정체인 문자를 그렇게도 한결같이 발송해댈 리가 없다.

아니, 쪽지 주고받은 것 밖에 없는데 어디 내 사진이라도 유출됐나? 부쩍 갑자기 더 재촉을 하네.(어차피 얼굴도 공개 안 되는 공간인데 이럴 때라도 아무 말 대잔치 한 번 해 봅시다. 잔치에 너무 박하게 구는 거 보기 안 좋습디다 그려.)

 

농촌 일선 행정이라고는 하나도 모르는 쪽지남 '때문에 씨'는 한창 우리 집이 농번기인데 속도 모르고 한번 만났으면 좋겠다. 자기가 이쪽으로 오겠다 이러면서 끈질기게도 연락을 해왔다.

내가 그쪽으로 서 너 번의 버스를 갈아타고 가느니 그가 중간지점까지 버스 한 번만 타고 오면 쉬울 일이라고 흡족해하면서도 금세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휘말리면 안 돼.

어느 S대생은 그날 끝마칠 공부의 양을 끝내지 못하면 밥도 안 먹었다는데 그렇게까지는 독하게 마음먹지 못하더라도 '담배 일이 끝날 때까지는 내 사전에 외출은 없다', 고 다짐하려고도 했다.

 

지긋지긋한 2등 소리, 내가 자기를 지방직 공무원 시험에서 떨어뜨렸다고 근거도 없는 핑계를 대며 정말 귀찮게도 굴었다. (그 말을 들을 때마다 난 진짜 내가 1등으로 합격한 걸로 기정 사실화해버리며 기분 좋아하긴 했었다는 걸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다.)

하지만 나는 이성적인 사람이었으므로 순간의 감정에 휩싸여 둥둥 달뜬 기분에 취해 아무 사람이나 만나고 하는 그런 사람은 아니다. 게다가 그와 나는 온라인상에서 알게 된 사이가 아니던가.

신분도 불확실하다.

아무리 주위에 친구가 없어도 그렇지 모르는 사람한테 대뜸 만나자니?

한창 일한 나이에 잠깐 파트타임으로 일이라도 하든지 할 것이지, '구꿈사'카페 들락거리는 것 말고는 딱히 하는 일도 없어 보였다.

그렇다고 나와 그렇게 공통 관심사가 있는 것도 아니었으며 또 너무 교만한 것 같기도 해서 종잡을 수 없었다.

의심하자면 끝이 없었다.

요즘같이 험한 세상에 뭘 믿고?

그렇다고 알게 된 지가 오래된 것도 아니었고 내가 만날 날짜를 자꾸 미루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방학이 시작되면 내내 놀면서 미루고 미루다 개학 전날 밤에 부랴부랴 일기 쓰듯 세기의 만남이 될 그날을 미루는 맛이 있어야 했다.

우유의 유통기한을 너무 넘기면 부패하기 마련이지만 그와 나 사이에 유통기한 같은 것은 애초에 없었다.

아무리 만남을 미루고 미룬다 한들 탈이 날리는 없었다.

없었다, 고 생각했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