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나의 기쁨=나의 고통

그 젊은이가 수상하다

그래도 나는 2023. 9. 3. 0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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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녕하세요? 저도 이번에 OO 지역 합격한 사람이에요. 동기가 딱 우리 둘이네요."

 

웬 외간 남자가 말을 걸어왔다.

'내가 그를 알지 못하노라, 내가 그를 알지 못하노라, 내가 그를 알지 못하노라.'

부인하고 돌아서서 한없이 추리를 하였네.

모르는 사람이었다.

이 사람은 누구지?

 

'혹시 구꿈사 카페에서 자신이 2등이라며 나 때문에 떨어졌다고 허구한 날 말하던 그 '때문에 씨?' 아냐?'

모르는 사이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너무도 자연스럽게 접근해 와 순간 그런 생각이 든 건 무리도 아니었다.

그동안 나를 내내 속이고 나한테 장난친 거야 뭐야?

지금 나를 농락하려 드는 게야?

나에 대해 뭔가 아는 눈친데?

아무리 사교성이 좋은 젊은이라 하더라도 처음 보는 사람에게 넉살 좋게 먼저 인사하기는 쉽지 않을 터이다. 그것도 서로 아는 사람 하나 없는 사람들 속에서 말이다.

카페에서 내게 쪽지 세례를 퍼붓던 그간의 만행으로 미루어 짐작하건대 그 사람이라면 이렇게 천연덕스럽게 나올 수도 있겠다 싶었다.

어쩐지, 나 면접 보던 날도 어떻게 귀신같이 알고 바로 문자 보냈었잖아.

설마 면접일에도 내 옆에서 같이 면접 본 거 아니야?

만약 그랬다면 여간 치밀한 사람이 아닌걸.

세상에 어쩜 사람이 저렇게 의뭉스럽담?

그 해 지방직 공무원 시험 최종 합격자 발표가 나고 얼마 후 도 전체 합격자를 소집해 관광버스 같은 것을 타고 도내 투어인지, 주입교육인지를 했었다.


이젠 아예 '아가사 크리스티' 신내림을 받았다.

처음 지방직 시험을 본 날 오후에 '구꿈사' 카페에서 나는 어딘가 있을 경쟁자를 찾느라 혈안이 되어 있을 때 그는 쉽사리 정체를 드러내지도 않았었다.

 

<사건 발생 보고>

누가 : '때문에 씨'

언제 : 2009년 5월 23일 지방직 공무원 필기시험을 치른 후부터

어디서 : 공시생 카페 '구꿈사'에서(원조 집착남 맛집)

무엇을 : 무분별한 쪽지 발송을

어떻게 : 나 때문에 자신이 2등이 되어 필기시험에 떨어졌다며

도대체 왜 : 그게  미스터리다. 영원한 미제사건이 될 터였다.

 

관광버스 안에서 그와 통성명을 했다.

내가 묻기도 전에 나이를 밝혀 왔다.

그런데 어랏? 이 젊은이도 나보다 더 어린 이였네?

가만있자, 누구도 나보다 두 살 어리다고 했었는데.

냄새가 난다.

역시 내 직감이 맞았어.

어쩜 이렇게도 감쪽같이 나를 속일 수 있는 거지?

이런 이중인격자 같으니라고.

난 이렇게 상봉하는 거 반댈세.

 

그 당시엔 쪽지와 문자만 오갔지 전화통화는  번도 해 보지 않았을 때라 목소리를 들어 본 적이 없었다.

이미 서로 전화번호가 요단강을 건너가 버린 마당에 '때문에 씨'는 뭐가 그리도 걱정인지, 나는 그 목소리에 관심도 없고 전화통화 같은 건 하고 싶은 마음도 없었는데 자꾸

"저는 목소리가 별로 안 좋아요. 목소리가 좀 별로라서..."

이런 말만 되풀이하는 것이었다.

저기요, 나 그쪽 목소리 듣고 싶은 생각 없어요.

무슨 전화 상담사도 아니고 목소리가 좋든 말든 나랑 무슨 상관이며 내가 알게 뭐람.

남의 동생의 난데없는 고해성사는 누님을 어리둥절하게 했다.

누가 목소리 가지고 뭐라고 했었나? 괜히 혼자 왜 저래?

어머, 별꼴이야 정말.

 

생각할수록 '때문에 씨'와 그 젊은이는 퍼즐 조각이 맞아떨어졌다.

근데 좀 이상하다?

'구꿈사' 카페에서 나보고 자신도 일행직으로 시험 봤다고 했는데 분명히.

그러면서 일행직이 한 명뿐이라 나 때문에 자신이 떨어질 거라며 그거 하나로 그동안 집요하게 밀고 나온 사람인데 뭐가 안 맞는 거 같아.

그런데 지금 그 젊은이는 분명히 시설직이라고 했겠다?

그럼 뭐야?

그동안 나한테 다 거짓말 한 거란 말이야?

이거 완전 상습범이구만?

제법 교활하기까지 한데.

사기 결혼당한 새색시처럼 사기 '접속'을 찍었던 나는 분개했다.

대체 이런 식으로 얼마나 많은 수험생들을 꾀어낸 거지?

아니지, 난 아직 그 꾐에 넘어가지는 않았지.

 

미안하지만 난 이쯤에서 '접속'에서 하차할 테야.

상대 배우가 너무 진실하지 못해서 말이지.

보기 좋게 난 벗어나 보겠어.

진짜 제비일지도 몰라.

세상이 워낙 흉흉하니 공시생으로 피폐하게 살다가 필시 저렇게 타락해 버린 것이야.

이 차디찬 사회와 뭇사람들의 무관심 속에서 한 때는 멀쩡했을 한 젊은이가 나락으로 떨어져 버린 거야.

역시 세상은 넓고 별의별 사람들은 다 있었구나.


그 젊은이를 아예 '때문에 씨'라고 단정 지어 버리고 나는 어떻게 직접적으로 말을 하지 않고 그 사람이 이 사람과 동일 인물인지를 입증할 수 있는 증거 수집에 들어갔다.

나는 행정법을 공부한 여자다.

물론 그 내용은 내 머릿속에서 빠져나가 자유로운 영혼이 된 지 오래였지마는.

입증책임의 원칙,

그것은 바로 내게 있었다.

그 젊은이도 호락호락하지는 않았다.

몇 마디 대화를 나눈 것만으로는 증거자료가 충분치 않았다.

하루 종일 도 내를 빙빙 돌며 관광을 하는 동안 이렇다 할 성과는 없었다.

가끔씩 가느스름하게 가자미 눈을 떠보는 행위만으로는 건질 만한 게 없었다.

그날의 기억은 관광과 추리와 관광과 추리와 관광과 추리, 단 두 가지뿐이었다.

결정적인 뭔가를 찾아내기엔 하루 해가 짧았다.

모든 것이 다 뱅글뱅글 머릿속에서 어지럽게 돌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