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로 우리 집안 공무원이 끝날 줄 알았는데, 네가 이렇게 합격해서 정말 기쁘다. 네가 내 뒤를 이어간다고 생각하니까 든든하다."
참 이상도 하지,
난 삼대독자 집안에 대를 잇기 위해 시집을 간 종가의 며느리도 아닌데 왜 자꾸 '뒤를 잇는다.'라고 하시는 거람?
그 옛날 시아버지에게 무언의 압박으로 아들 출산을 강요당하는 며느리도 이처럼 부담스럽지는 않았으리라.
가난한 수험생의 노래는 비로소 끝이 났다. 구슬펐던 가락은 마침내 환희에 들떠 화려한 코러스로 마무리 지어졌고 더 이상 청승맞은 노래는 부를 일이 없을 줄 알았다, 그 당시에는.
신바람 나게 콧노래만 부르고 살 테야.
감히 다짐을 했다.
지방직 공무원 최종 합격자 발표가 있었고, 제일 먼저 부모님께 이 기쁜 소식을 알린 후 다른 가족들과 친구들에게도 재빨리 전했다.
어떻게 알고(알아보려면 달랑 한 명 뽑는 일행직 공무원 시험이었으니 방법이야 있었겠지.) 앞서 등장하셨던 그분께서 몸소 우리 집을 찾아오셨다.
아마도 내부 결재가 다 이뤄진 후에 군청 안에서는 이미 소문이 났을 테고 공식적으로 외부로 공고문이 나가기 전에 충분히 알아볼 수 있었을 것이다.
저녁에 그분 댁에서 차라도 한 잔씩 하면서 얘기 좀 하자신다. 그것도 나의 부모님과 함께 말이다.
미성년자도 아닌데 느닷없이 부모님까지 동반하라니 무슨 말씀을 하시려고 그러시나?
확인할 길은 없지만 평소 조카에 대한 애정이 남달랐다고 느꼈던 지라 마땅히 거절할 핑곗거리도 없던 차에 일방적인 티타임을 갖게 되었다.
저녁 바람은 산들산들 기분 좋게 내게 살을 비벼댔고 인적 드문 시골 마당에 '찌르르르 찌르르르' 풀벌레 소리도 듣기에 싫지 않을 만큼 좋았다.
까만 밤하늘에 별은 총총 돋아 자꾸 깜빡깜빡 빛을 내던 여름밤이었다.
어떤 풍경인들 숨 막히게 아름답지 않을 것이며, 그 어떤 소리인들 사랑의 세레나데로 귓가에 울리지 않으랴.
어제의 (장수) 공시생이 오늘엔 합격자가 되었으니 말이다.
그렇게 '4자 대면'은 시작되었다.
그 밤을 잊을 수가 없다.
아무리 건망증이 심해져 가는 나일지라도 기억에 선명히도 화석처럼 굳어진 장면들이 몇 있는데 그중 하나가 그날의 그것이다.
그 친척분에겐 시골 우리 집 바로 위에 옛집이 있었고 근처 면 소재지에 또 집을 짓고 살고 계셨는데, 옛집에 자주 들르시기도 했고, 함께 근무하는 직원들을 초대해서 식사 대접도 종종 하셨으며, 그때마다 내가 차출돼서 우리 집 상추도 뜯어서 갖다 드리고, 고추도 따고 된장은 덤으로 챙겨 여러 반찬들도 대접하곤 했었다.
가만, 그러고 보니 이런 게 바로 그 '의전'이라는 건가?
그때는 상상도 못 했다.
그때 그분의 옛집을 찾았던 직원 중 한 사람을 내 첫 발령지에서 다시 만나게 될 거란 걸. 외진 산속 시골집까지 동행해 차를 끌고 왔던 또 다른 직원과 수년이 흘러 흘러 한 사무실에서 마주 보고 근무하게 되리라는 걸.
이게 뭐야, 오차 범위가 너무 좁잖아.
아, 좁은 동네에서의 예상 밖의 인연이라니.
'피천득 님과 아사코의 인연'만큼이나 아니 만났으면 좋았을 것이다.
어찌 된 일인지 우리 부모님보다 그분이 더 기뻐하시는 것 같았다.
지방행정 9급 공무원이 뭐라고......
물론 그동안 나에게 물심양면으로 많은 도움도 주시고 알게 모르게 신경 많이 써 주셨다는 것을 나도 잘 알고 느끼고는 있었다.
그때 하신 말씀이 아직도 생생하다.
"진짜 나는 네가 자랑스럽다. 우리 집안이 네 덕분에 공무원을 이어서 할 수 있게 됐다."
라고 하시던 말씀이 서서히 나를 옭아매기에 이르렀다..
그분의 마음에 자랑스럽게 걸리던 '축 (조카) 공무원 합격'이라는 플래카드를 본 듯도 했다.
시골에서는 요즘도 경사스러운 일이 생기면 그나마 가장 번잡하다고 판단되는 사거리에, 마을 입구에 자녀, 손자, 사위, 조카의 '축 OO 합격', '축 OO승진', '00 면장 취임' 같은 플래카드가 춤을 추곤 한다. 하다 못해 '제0회 OO초등학교 졸업생 OOO 농림축산식품부 장관상 수상을 축하합니다.'라는 그것도 말이다.
아, 그런데 말이죠, 그게요, 잠시만요.
뭔가 착각하신 것 같은데요.
저 무슨 행정고시 그런 거 합격한 거 아니고요, 그냥 지방직 공무원, 그것도 최하위직 9급에 공채로 붙은 것뿐이에요.
한 해에도 수 백 명씩 뽑는 그 공무원 9급이라고요.
알고 보면 그리 대단한 사람도 못되고 허술한 점도 아주 많은 사람인데, 어쨌거나 너무 부담스러웠다.
항상 느끼는 거지만 나의 실체를 잘 모르시고 어쩔 땐 너무 과대평가하시는 거 아닌가 싶다.
너무 감정 이입하시는 거 아냐?
그래도 그게 다 진심으로 기뻐하고 축하해 주는 마음에서 그러시는 거니까 고마울 따름이다.
밤늦도록 차를 마시며 당부의 말씀도 잊지 않으셨다.
앞으로 공직생활은 이렇게, 저렇게, 요렇게......
교장 선생님의 훈화 말씀 같은 그 인생의 우여곡절 속에서 나까지 잠시 허우적댔다.
벌써 30년도 넘게 공직에 몸담고 계신 산증인이 아니시던가.
시대가 많이 바뀌고 공직문화도 좋은 방향으로 많이 개선되고 어쩌고 했다지만 시대를 뛰어넘어 아우르는 뭔가는 있겠지.
마음 깊이 새겨듣지는 않았을지언정 적극적으로 참고할 만한 내용은 쏙쏙 뽑아 갈무리를 했다.
나름대로 인생의 첫 공직생활을 핑크빛으로, 그것도 핫핑크로 아름답게 꿈꾸기도 했던 시절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