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도 나는 2023. 8. 29. 2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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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는 닭 모이만 주고 오시면

"아빠는 닭 모이만 주고 오시면 되지 왜 계속 거기 계시는 거야?"

"닭들이 먹기도 전에 참새들이 와서 다 먹는다고 그놈들 쫓는다고 그러신단다."

세상에 만상에, 이렇게나 비효율적일 수가!

 

그러니까 아빠가 참새를 철천지 원수 보듯 하는 데에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그놈들이 얼마나 많이 와서 먹는 줄 아냐? 아주 그놈들 세상이다. 사과나무에다는 똥 다 싸 놓고 가고."

엄마는 분개하셨다.

그날도 아빠는 닭 모이를 주시고 닭들이 그것을 다 쪼아 먹을 때까지 자리를 지키고 계셨다.

언제까지 그렇게 할 수도 없는 노릇인데 참새와 아빠의 쫓고 쫓기는(하지만 안타깝게도 참새들은 전혀 쫓기는 신세로는 안보였다 내 눈에는.) 숨도 안 막히는 (인간에게만) 팽팽한 신경전, 다른 방법이 절실했다.

아닌 게 아니라 친정에 가면 마당 멀리 있는 사과나무 아래에서 유유히 닭들이 거닐고 있으면 참새떼가 우르르 날아와 그곳을 점령한다. 남아있는 모이라도 있으면 누가 주인인지도 모르게 자리를 떡하니 버티고 앉아 기어이 바닥을 보고야 만다. 원주민(?)인 닭들은 이주민인 참새떼가 달려들면 자리를 비켜주기까지 한다. 

아니, 쌈닭의 위상이라곤 눈 씻고 찾아볼 수가 없잖아 이거!

이건 뭔가 잘못돼도 한참이나 잘못됐다.

한동안 아빠는 참새 먹이를 대 주는 일에 손수 나서서 헛수고만 하신 셈이다.

처음엔 그냥 참새들이 와서 놀다 가는 줄로만 알았다, 나도.

그러데 희한하게 모이가 남아 있을 때만, 혹은 부모님이 모이를 주고 나간 바로 직후에 우루르 얄미운 고것들이 날아오는 것이다.

아빠 말씀대로 거기 있는 내 딸의 탄생 기념수인 사과나무 두 그루 가지마다 올망졸망 여기저기 앉아있다가, 마당가에 있는 대추나무에도 앉아 있다가, 무화과나무에도 앉아 있다가, 그도 아니면 지붕 위에서, 전깃줄 위에서 내려다보고 있다가 기회를 놓치지 않는 것이다.

 

부모님과 나는 그 주먹만 하지도 않은 탐관오리들에게 혀를 내둘렀다.

손하나 안 대고 코를 푼다.

남이 차려 놓은 밥상에 달랑 입만 가져왔다.

엄연히 남의 몫인 것을 아무렇지도 않게 파렴치한 행동을 일삼는 무리들이다.

결정적으로 뻔뻔하다.

우리 집에 안 와 본 참새는 있어도 한 번만 온 참새는 없다고 감히 확신하는 바이다.

상품성이 떨어지는 좁쌀이나 곡물 가루 이런 것들을 닭 모이로 쓰려고 여기저기서 후원을 받아 두었다.

닭들 먹으라고 양껏 뿌려놓은 모이를 엉뚱한 참새떼가 다 착취해 버리니 아빠는 더 이상 참지 않기로 하신 거다.

참는 대신 그 모이를 닭들이 다 먹어 치울 때까지 자리를 지키고 계시는 거다.

"엄마, 근데 저렇게 아빠게 계속 지키고 있으려면 시간도 오래 걸리고 그럴 텐데 어떡해?"

한여름에도 정말 새 모이만큼 조금만 덜어서 열 마리도 넘는 닭들이 골고루 먹도록 배분해서 옆에 지키고 계시는 모습을 보면 내가 다 땀이 줄줄 흐른다. 그 와중에도 '고놈들'이 날아오지나 않나 경계 태세를 늦추는 법이 없으시다.

"그러니까 모시(모이)를 쪼끔씩만 주제. 하루에 세 번 나눠서 준단다. 그 참새들 꼴 보기 싫다고."

처음엔  닭보고 많이 먹으라고 넉넉하게 먹고 남길 정도의 모이를 주셨단다. 농사일이 바쁘니 한꺼번에 왕창 주고 한참 후에 모이가 다 떨어지면 다시 채우는 방식이었다. 그런데 사방에서 날아든 탐관오리들 때문에 아빠는 특단의 조치를 내리신 거다.

그 얄미운 참새 때문에 닭들이 '소식'을 할 수밖에 없는 안타까운 사연이 친정에 전해지고 있다. 

소식하는 닭이 장수한다던데, 아마 친정집 닭들은 장수할 것이다.

비야흐로 닭도 (강제로) 소식좌의 시대가 열렸다.

 

남들에게 베풀기 좋아하고 내 것도 남에게 주기 좋아하는 성격의 아빠지만 탐관오리들에게만큼은 예외였다.

결정적으로 그 새들은 공짜로 다 해결하려고 한다.

하다 못해 지렁이 한 마리 벌레 한 마리라도 물어다 줘야 양심이 있는 거 아닌가?

저희들 먹을 것만 홀랑 다 먹고 날아가고 또 왔다가 먹고 날아가고, 자신들의 이익만 취하고 나 몰라라 하는 전형적인 탐관오리의 그것이 아닌가 말이다.

비단 참새들에만 한하랴.

더한 인간들도 얼마든지 있다.

 

'참새야, 어디서 오가며 나느냐'(사리화, 이제현)

정말 말이 통한다면 한 소절 읊어주고 싶을 지경이다.

이젠 송창식의 '참새의 하루'도 예사로 들리지 않는다.

참새의 실체를 모르는 사람들은 정말 우리 속을 모른다.

어쩌면 그 탐관오리와 참새는 이리도 똑 닮았는지.

예의 그 탐관오리는 요즘에도 여전한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