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하지) 않(은) 남매

코가 간지럽다면 그건 아마?

그래도 나는 2023. 8. 28. 08: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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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가 왜 이렇게 간지럽지, 엄마? 누가 어디서 내 얘기하고 있나 봐."

 

아들아, 아들아,

난 네가 없었으면 어쩔 뻔했니?

나의 기쁨,

나의 번뇌,

나의 엉뚱한 열 살.

"코가 간지러우면 누가 네 얘기를 하는 거야?"

오래간만에 또 아들이 조상 대대로 내려오는 속담인지, 유언비어인지도 모를 출처도 불분명한 그 '복된 말씀'을 하셨다.

나는 잠시 아들과 만담의 시간을 기꺼이 가져야 하리.

"우리 아들. 그게 무슨 말이야?"

"코가 간지러우면 누가 내 말을 하고 있다는 증거잖아. 엄만 그것도 몰라?"

"아, 그런 거였어? 엄만 몰랐네.(= 당연히 모를 수밖에 없지. = 코 말고 다른 데가 간지러우면 남이 내 말을 한다는 그것만 알아도 될 것 같다. = 세종대왕님이 부활하신 대도 그런 말은 모르실 게다. = 애초에 신체 부위가 잘못 튀어나왔는데 엄마가 꼭 그것까지 알아야겠어?)"

"하여튼, 엄마는 그것도 모르고 말이야."

"우리 아들은 그런 말을 또 어떻게 아셨을까나?"

"엄마, 책을 보면 다 나와 있어. 그러니까 책 좀 봐."

이런 걸 보고 고급 전문용어로 '번데기 앞에서 주름잡는다'라고 한다지 아마?

얘가, 얘가 공자 앞에서 문자 쓰려고 하네?

지금 누가 누굴 보고 책을 보라는 게지?

그날도 열 살 아들은 제 엄마를 앞에 두고 아무 말 대잔치를 성대하게 치르면서 뭔가 '부적절한 언행'을 일삼았다. 그러니까 (지금은 쓰지 않는 말이지만, 과거 민원실에서 새 주소 정비 작업에 미친 듯이 일했던 시절에 치가 다 떨렸지만) 그 순간만큼은 꼭 써야만 하는 그 단어, 다른 단어로 대체 불가능한 그 단어, 그러니까 '번지수 잘못 찾았다.'는 말을 아들에게 해 주고만 싶었다.

 

"정말 우리 아들은 대단해. 그런 말도 다 알고. 근데 뭐가 좀 이상한 것 같지 않아?"

"뭐가?"

"아니, 엄마도 비슷한 말을 들어보긴 했는데 말이지."

"엄마가 어디서 그런 말을 들어봤다고 그래?"

"아무튼 들어봤어. 근데 우리 아들이 말한 거랑 엄마가 알고 있는 거랑 좀 다른 것 같아서 말이야."

"무슨 말이야?"

"코가 간지러우면 누군가 네 얘기를 하는 거라며?"

"맞아. 코가 간지러우면 남이 내 얘기를 하는 거래. 그러니까 지금도 누가 내 얘기를 하고 있는 거야."

"그렇구나. 우리 아들이 인기가 많은가 보다. 네가 없는데서도 네 얘기들 남들이 할 정도면."

"나도 몰라. 아무튼 코가 너무 간지러워."

과연 나는 어느 시점에서

"코가 간지러운 게 아니라 귀가 간지러울 때 누군가 네 얘기를 한다는 뜻이란다."

라는 그 비보를 아들에게 터뜨려야 한단 말인가.

과연 그 어마어마한 충격적인 발언을 할 황금 시간대란 언제란 말인가.

"우리 아들, 혹시 '귀가 간지러우면 남이 내 얘기를 하는 거다.'는 그런 말 들어 봤어?"

순식간에 아들은 태도가 급변했다.

눈치 하나는 빠르다.

"아! 맞아. 코가 아니라 귀였지!"

"그래도 정말 대단하네. 어쨌든 얼굴에 붙어 있는 신체 부위잖아. 코면 어떻고 귀면 어때? 우리 아들이 지금 이 상황에 그런 말을 인용했다는 게 중요하지. 안 그래?"

"무슨 소리야? 코랑 귀랑 어떻게 같아? 귀가 간지러워야지."

엉뚱하기로 치면 우리 집 멤버 중에 최고인 아들, 너무나 사랑스러운 나머지 생각만 해도 엄마 입가에 실실 미소가 흐르게 만드는 (나에게만) 대단한 파워 인플루언서!

누가 이런 아들을 낳았는고?

하루빨리 군대에 갔으면 싶다가도 영영 내 옆에 있어줬으면 하고 하루에도 수 십 번씩 엄마에게 기쁨과 번뇌를 안겨주는 열 살의 위대함이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