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하지) 않(은) 남매

스티커의 유혹

그래도 나는 2023. 8. 13. 08: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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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오늘은 무슨 색깔로 채점해 줄까? 골라 봐."
"그럼 이 색으로 해 줘!"
 
채점자의 사회적 지위와 체면을 생각해서 권위만을 내세우지 않고 철저히 학습자의 입장을 배려한 누나의 말이었다.
자그마치 8가지 색을 고를 수 있는 볼펜을 들고 누나는 그날도 동생의 문제집을 들추기 시작했다.
 
"쯧쯧, 글씨가 이게 뭐냐? 앞으로는 이렇게 헷갈리게 쓰면 답으로 인정 안 해 줄 거야!"
"누난 글씨도 못 알아봐?"
"네가 이상하게 쓰니까 그렇지."
"난 다 알아보겠는데?"
"그거야 네가 썼으니까 그렇지."
"알았어. 그냥 맞은 걸로 해 줘."
"그리고 여기 좀 이상하다?"
"어디 봐. 잠깐만. 다시 풀어 볼게."
"너, 집에서 하니까 이게 가능하지. 학교에서 시험 본다고 생각해 봐. 시험지 내고 나중에 선생님한테 달라고 해서 문제 다시 풀 수 있을 줄 알아? 학교에서는 어림도 없어! 이러면 스티커 다시 뗄 거야."
"에이, 좀 봐줘."
"이번만 봐줄 거야. 다음부터는 안 봐줘."
"근데, 왜 여기는 단위를 다 빼먹은 거야? 단위까지 써야 맞은 거야. 이건 세모야 세모. 그래도 답은 맞았으니까 성의를 생각해서. 정신을 차리고 해야지. 얼마나 집중을 안 했으면 이렇게 줄줄이 다 빼먹었어?"
"깜빡했지, 그래도 반은 맞았잖아. 누나도 단위 빼먹을 때 있었잖아."
"여긴 또 왜 이래? 한쪽이 다 틀렸잖아. 무슨 생각을 하면서 풀었길래 이렇게 다 틀렸어? 빨리만 푼다고 해서 다 좋은 게 아니라니까."
"그럴 수도 있는 거지, 어린이가. 누나는 뭐 문제 안 틀려? 날마다 무조건 다 맞아? 아니잖아! 누나도 문제 틀릴 때 있잖아."
 
어느 가정에서나 있을 법한 초3과 초5의 대화이다.
가만히 듣고 있으니 점점 남매가 파행으로 치닫고 있는 것 같았다.
잘 나가다가 인신공격의 오류를 범하는 아들이 아슬아슬했다.
언제나 그렇듯 그날도 누나는 동생의 문제집을 매의 눈으로 채점하고 있었다.
언젠가 한 번 채점을 해 보더니 재미있어하면서 자기가 그 일을 도맡아 하겠다고 했다.
간혹 틀린 문제가 나오면 자신의 지식을 총 동원해 일장연설을 해 가면서 가르치는 재미에 귀찮아하는 기색도 전혀 없다.
"엄마가 다 하려면 힘들잖아. 내가 할게."
엄마에게 효도를 하려는 것인지, 으스대며 동생을 가르치려는 것인지 애매한 그 동기에 나도 굴복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솔직히 딸의 문제집 채점을 하루 깜빡하고 안 할 때도 있지만(남편에게 여러 차례 발각돼 수난을 당한 과거가 숱하게 있다.) 딸은 깜빡했다가도 잠자기 직전에 그 일을 마무리하고 잠자리에 든다.
동생만을 위한 1대 1 방구석 과외가 시도 때도 없이 시행된다.
물론 잘 나가다가 티격태격하기도 하다가 또 둘이 옆에 딱 붙어 앉아 금세 장난치고 잘 논다.
 
"내가 너 잘 풀면 붙여주려고 이 스티커 가져왔어. 그러니까 앞으로 잘해 봐.
방학을 시작함과 동시에 딸은 동생에게 어떤 동기부여를 함과 동시에 학습에의 의지를 불어넣어 주었다.(고 나는 생각했다.)
나이가 몇 살인데, 유치하게 그런 게 아들에게 먹힐까 싶었지만, 먹혔다. 
그것도 아주 잘.
아니, 아들에겐 스티커가 전부였다.
"오늘은 잘했으니까, 특별히 이 붙임 딱지를 하나 주겠어!"
"누나, 그러지 말고 하나 더 주라."
"알았어, 원래는 하루에 하나씩인데 잘 풀었으니까 더 붙여줄게."
"와아~ 엄마 나 스티커 받았어. 누나가 붙여줬어."
스티커 그거, 먹지도 못하는 거, 어디 써먹지도 못하는 거, 밖에 들고나가봐야 아무 효력도 없는 거, 그거 하나 받겠다고 아들은 누나에게 애교를 다 떨었다.
딸이 제 교과서에 있던 것을 뜯어 왔다고 했던가? 아니면 문제집에 있는 거였다고 했던가?
어쨌거나 아들의 학습의지가 약해질 때쯤이면 딸은 어김없이 비장의 카드를 꺼내 들며 다시금 아들을  일으켜 세워주었다. 신기하게 마치 한 번도 스티커를 안 받은 어린이마냥 아들은 또 그것을 쟁취하고자 학구열을 불태운다.
 
 
"엄마, 이건 왜 틀렸어? 착각한 거 아니야? 설명해 봐. 왜 틀린 거야? 다시 잘 봐봐."
내가 딸의 문제집을 채점하면서 틀린 문제를 체크해 두면 딸은 나의 실수를 귀신같이 찾아내기 일쑤다.
당황하지 않고 정답 해설집을 나는 붙들어야 한다.
이제 나까지 가르칠 기세다.
실제로도 가르친다.
우리 집 네 멤버 중 그 누구도 그녀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아마도 가르치기 좋아는 호르몬이란 게 있다면 그 요망한 것이 과다분비되고 있는 게 틀림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