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명에 남편의 교육행정직 합격이 달렸다(고 믿었다)

'합격이'
나의 첫 번째 아이의 태명이다.
나는 당시 남편의 합격보다도 임신이 간절했다.
그래서 임신하기 위한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했다.
온 정신이 임신에만 가 있었을 때 마침내 확신이 들었을 때 내가 임신한 것 같다고 하자 남편은 상상 임신일 거라며 쳐다도 안 봤다 사실은.
나의 노력이 가상했는지 삼신할머니가 인색하게 굴진 않으셨다.
아무래도 그 해에 남편의 교행 합격이 좀 어려울 듯싶어 급히 가족계획을 세워 임신을 하게 된 나는 그래도 남편인데, 아이 아빠인데 태명으로라도 교행 시험에 합격시켜 주자고 태명을 '합격이'라고 지어준 것이다.
그 콩알만 한 것이 무슨 힘이 있다고 아빠를 합격시켜 준단 말이더냐.
원래 태명이란 게 좋은 의미를 많이 담을수록 좋을 테니까.
부모의 소망이 가장 잘 담겨 있는 게 태명 아니려나.
어째 아이의 앞날보다는 이미 다 큰 아빠의 밝은 앞날에 대한 소망으로 가득 찬 태명 같은 느낌을 지울 수는 없지만.
그래도 그렇지 첫아이에게 내가 저런 태명을 지어 주리라고는 생각도 못 했는데.
결혼도 하기 전에 알록달록 간지럽고 달뜨게 만드는 그런 태명들을 내가 얼마나 리스트에 많이 기록해 놨었는데 '합격이'라니.
참으로 알 수 없는 내 인생.
상황이 나를 그렇게 만든다.
만약 남편이 시험에 불합격이라도 하게 된다면? 태명을 바꿔야 하는 건가?
태명을 개명하는 법도 있다던가?
아직까지 그런 말은 못 들어봤다.
불길한 생각은 아예 하지도 말자.
일단은 '합격이'로 밀고 나가자.
남편도 자극을 받을 필요가 있다.
"자기야. 나 태명 정했어. 이제부턴 '합격이'라고 부르면 돼."
"뭐? 무슨 태명이 그래? 아무리 그래도 '합격이'가 뭐야?"
"왜? 얼마나 좋아? 얘가 자길 이번에 합격시켜 줄 거야."(=정신 바짝 차려라잉. =주식 당장 끊어라.=엉뚱한 짓은 이제 그만하고.=이제 식구가 셋이나 된다.)
"그래. 뜻은 좋기는 한데 태명으로는 좀."
"뜻만 좋으면 돼. 그리고 자긴 시험 준비만 잘하고 있어. 나머진 내가 다 알아서 할게."
서로 잘나서 알아서 하겠다는 이 부부.
'합격이'를 부를 때마다 남편은 찔끔하겠지?
잊고 있다가도 태명을 들으면 아마도 정신이 번쩍 날 거야.
눕고 싶다가도 벌떡 일어나게 될 거야.
'합격아, 너만 믿는다.'
콩알만 한 것이 책임감이 무거웠겠어 이제 생각해 보면.
양가에선 경사가 났다.
처음 결혼 전부터 세 살 많은(실제로는 두 살인데도) 나에 대해 그리 호감을 갖지 않았던 시가는 아무래도 손주 걱정 때문에 그랬나 보다.
노산이라고.
그때 내 나이가 서른둘 일 때 1월에 결혼하고 그 해 9월에 임신 사실을 알렸는데 시골 시가에서는 내 나이가 많다고 은근 걱정했었나 보다.
직접 말은 못 하고 은근히 기다리고 계셨던 눈치다.
지금 아들 상황이 어쩐지도 모르고.
아들이 내 옆에서 어떤 만행을 저지르고 사는지도 모르고.
솔직히 서른두 살이 노산까지는 아닌 것 같았는데 다들 주변에서 노산이라고 한다.
요즘은 마흔에 결혼하는 사람도 있는데, 마흔 넘어 결혼해서 아들까지 낳은 산증인도 멀지 않은 곳에 사는데, 아이를 낳기 위해 결혼하는 것도 아닌데 왜 그리 나이를 들먹이나 모르겠다.
남의 일인데 알아서 할 텐데 말이다.
키워 줄 거 아니면 간섭 좀 안 했으면.
그런 사람에게는 키워준다고 해도 안 맡긴다 내가.
엄마는 드디어 밥값을 했다고 좋아하셨고, 시가에서도 장한 며느리가 되었다.
우리 집에선 사위가 일 그만두었는지 모르고, 시가에는 아들이 휴직했다는 거짓말로 안심시켰는데 그 와중에 며느리가 혼자서 경제 활동하는 마당에 임신까지 했으니.
아들이 지금 직장을 나가든 어쩌든 이제 그런 것은 안중에 없었고 장차 손주 안아볼 생각에 그렇게 기뻐하실 수가 없었다.
아버님이 연세가 많으시다고 결혼도 서둘렀는데, 연세 많으신 아버님이 무척이나 좋아하셨다.
엄마도 나에게,
"시가에서 말만 안 했지. 얼마나 기다리셨겠냐."
라며 이제야 임신한 것을 나무라셨다.
엄마. O서방이 지금 어쩌고 있는지는 아시오?
우체국 그만둔 지가 언젠지 아시오?
엄마들, 딸이 못하고 사는 얘기도 무지하게 많다는 것만 알고 계시오.
전에 다 경험 하셨잖수?
우리 집에서 남편이 의원면직한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기에(알았는지도 모르지만, 일단 내가 직접 얘기는 안 했다.) 그동안 왜 아이를 안 가지냐고 엄마가 은근히 애타 하셨던 것은 사실이다.
어른들은 그저 결혼하면 애부터 낳으라고 재촉하시니.
기쁨도 잠시, 일단 임신은 했는데 앞으로 남편의 행보가 어찌 될지 모르겠다.
책임감에 정신 차리려나?
내가 노린 건 그거였는데.
복병이 찾아왔다.
나는 입덧이 세상에 그렇게 어마 무시한 건 줄 전혀 몰랐다.
이건 아기 낳을 때보다도 더한 고통임에 틀림없다.
그때까지 아직 출산의 경험을 한 적은 없었지만 그래도 출산보다 입덧의 고통이 더하면 더했지 덜하진 않을 것 같다는 느낌이었다.
지금도 생각하고 싶지도 않다.
내가 지금껏 경험한 일 중에 다시는 돌아가고 싶지 않은 때가 대표적으로 두 시절이 있는데 하나는 공시생 시절이고 다른 하나는 임신 중 입덧하던 기간이다.
끔찍하다.
생각만 해도 속이 울렁거린다.
사무실 사람들은 나처럼 입덧 심하게 하는 사람 처음 봤다며 혀를 내둘렀다.
갑자기 나도 모르게 저 뱃속 깊은 곳에서부터 울렁증이 올라와 의도하지도 않았는데 괴물 같은 소리를 내며 당장 일을 치를 것처럼 토하게 되는 것이다.
"자기야. 토할 때 좀 조용히 토할 수 없어? 옆집에서 항의 들어오겠어."
나는 입덧하는 동안에 자다가도 토하기도 했고 그 소리도 너무 크고 요란해서 정말 나도 민망할 지경인 때가 여러 번 있었지만 저런 소리 하는 건 아니지.
그것도 남편이라는 사람이.
이 인간이 정말.
누군 그렇게 하고 싶어서 하는 줄 아나?
네가 입덧이 뭔지나 알아?
지금 누가 누굴 단속하려 들어?
남편이라는 사람이 잠자고 싶을 때 자고, 먹고 싶을 때 먹고, 세상 편하게 살고 있으면서 입덧 심한 아내한테 그게 할 소리냐고!
"나라고 뭐 하고 싶어서 그러는 줄 알아? 나도 진짜 힘들다고. 짜증 나게 힘들어 진짜!"
입덧을 심하게 했던 사람들은 그 기분 알 거다.
임신은 기쁜 일이지만 입덧은 유쾌한 일은 절대 아니다.
별개다.
내 아이가 이쁘긴 하지만 아이 키우는 일은 무척이나 힘들다는 것과 일맥상통하는 것처럼.
그때 나는 처음으로,
'어린아이 들어갈 만한 캡슐에다 인공수정을 해서 열 달이 지난 후에 꺼내기만 하면 되는 그런 기술은 아직 멀었나. 굳이 엄마가 열 달 내내 품고 있어야 할 까닭이 있을까. 아빠한테 옮겨 줄 수는 없는 건가'
하고 말도 안 되는 생각을 많이 하기도 했다.
음식을 제대로 먹기를 하나 잠을 제대로 자기를 하나, 속이 편하기를 하나.
임신이 이런 건 줄 알았더라면......
아니지 아니지.
큰일 날 소리다.
뱃속에서 아기가 다 느끼고 있다.
난 임신부다.
태교를 잘해야지.
세상 엄마들 정말 대단하다.
입덧을 이렇게 하고 자식을 넷이나 낳은 우리 엄마도 진짜 대단하다.
그때는 무통주사도 없었고, 게다가 병원은커녕 집에서 그냥 넷을 다 출산했는데.
농사일은 농사 일대로 다 했겠지?
엄마가 처음 시집왔을 때 시아버지는 안 계시고 병약한 시어머니에 막내 시동생은 이제 8살, 아빠 아래로 줄줄이 시동생, 시누이.
한두 명도 아니고 시동생이 자그마치 여섯이었다.
갑자기 뒤돌아보게 되는 여자의 일생.
나였으면 진작에 보따리 쌌을지도 모른다.
우리네 엄마들 정말 대단하시다.
여자는 약하지만 엄마는 강하다는 말이 괜히 나온 게 아니라니깐.
그래도 입덧하는 엄마는 너무 괴로운 건 사실이다.
그때만큼은 괴로움이 위대함을 이긴다.
그래, 효도하고 살자.
나는 지금 복에 겨운 거다.
내려다보고 살자.
"어머님, 이 사람이 입덧을 너무 요란하게 해요. 좀 살살했으면 좋겠는데, 소리도 너무 크고."
라고 말하는 철딱서니 없는 하나뿐인 사위.
"이 사람아 그게 그렇게 마음대로 된당가?"
라고 어이없어하며 대꾸하는 우리 엄마.
상대를 봐 가면서 하소연을 하더라도 하시어요.
우리 엄마한테 뭐 좋은 소리 듣겠다고 본전도 못 찾을 소리는 하나 몰라.
평소에 사위에게 호의적인 편인 엄마였지만(일 그만둔 것도 몰랐으니까), 남편도 그때만큼은 엄마한테 좋은 소리를 못 들었다.
남편도 민망했는지 그다음부터는 그 말이 쏙 들어갔다.
정말 그 입덧을 멈출 수만 있다면 난 내 영혼이라도 다 팔아치우고 싶었다.
뭐 그런 요술 주사 같은 거 없을까?
아무런 감각도 못 느끼게 하는 그런 거 말이다.
병원에 가서,
"제발 이 입덧 좀 안 하게 하는 약 좀 주세요."
이렇게 애원을 했었다.
뭔가 처방을 받은 것 같은데 난 별로 효과도 없었던 것 같다.
중요한 건 나는 당시 직장 생활을 하고 있었다는 거다.
평소에도 비위가 워낙 약한 편이었는데 임신을 하고 나니 더 심해진 것 같았다.
오죽하면 언니들이 민원인들한테서 냄새가 좀 난다 싶으면 얼른 피신해 있으라고 나를 내쫓았겠는가.
민원인을 앞에 두고 내가 거기서 일을 치를 수는 없는 노릇이었으므로 나는 입덧하는 동안 종종 피난살이도 했었다.
어떻게 설명을 해야 할까.
몇 달간 이어지는 그 입덧 때문에 나는 생활도 잘할 수가 없었다.
의사나 주위 사람들은,
"입덧이 심하면 심할수록 아기가 건강하다는 증거래."
라며 나를 위로했지만 그런 말은 귀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당장이라도 그냥 아기를 낳아버리고 싶었다.
낳고 나면 최소한 입덧은 안 하겠지.
먼저 아기를 낳은 언니들을 보며 어떻게 열 달 동안 버텼냐며 존경의 시선을 보내기도 했다.
"어떡하냐. 입덧 짧게 하는 사람은 금방 끝나도, 길면 아기 낳을 때까지 하는 사람도 있다던데."
이런 말은 나를 절망의 늪으로 빠뜨렸다.
지금 1분 1초도 너무 괴로운데 출산 때까지?
암울했다.
차라리 지구가 멸망했으면 좋겠다.
남편이라도 옆에서 좀 힘이 되어 주면 좋으련만 입덧이 심하다고 엉뚱한 타박이나 하고 있으니.
게다가 공시생 신분이기까지 하시니 뭘 더 바라랴.
"내가 입덧 심할 때 그때 내 소원이 딱 한 가지였어. 구름도 한 점 없이 햇볕 쨍쨍한 초여름 날에 바람이 좀 심하다 싶게 불어야 해. 내 배를 갈라서 시원한 얼음 띄운 찬물을 준비했다가 내 속에 있는 걸 다 꺼내서 그 물에 넣고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박박 문질러서 다시 흐르는 찬물에 1,000번 정도 씻어다가 햇볕에 바짝 말리고 싶어. 물기 하나 없이 바짝. 바람은 태풍이 오기 전 바로 그 정도로 세게 불어야 돼."
결혼도 안 한 직원들을 앞에 두고 언니라는 사람이 '너희가 입덧을 아느냐'며 영양가 없는 소리를 해 댈 때마다 어린 그들은 칠색 팔색 했다.
"언니, 그 말은 너무 심하다."
"그러니까 결혼도 신중히, 임신은 더 신중히 하란 말이야. 계획 철저히 세우고."
오지랖도 넓으시지 나도.
할 수만 있다면 나는 내 소원대로 그러고 싶었다.
내 말을 들은 사람들은 너무 잔인하다며 임신부가 어쩌면 그런 생각을 다 하냐고 나무랐지만 당시 나는 정말 죽을 만큼 괴로운 입덧에 시달려서 제정신도 아니었다.
일하다가 갑자기 괴성을 지르며 화장실을 뛰어가면 사람들은 무슨 일 치르는 줄 알고 꼭 여직원을 한 명 내 뒤로 따르게 했다.
어쩌면 심하다 심하다 해도 그렇게 심할 수가 있을까.
그래도 나보다 더 한 사람도 있을지 몰라.
입덧이 심할수록 건강하다잖아.
아기가 건강하다는 증거일 뿐이야.
"언니, 나는 태어나서 언니처럼 입덧 심하게 하는 사람은 처음 봐."
하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던 그녀도 임신을 하더니 내 기록을 우습게 깨 버리고 '입덧의 여왕'자리에 올랐다.
'나도 너처럼 입덧 심하게 하는 사람은 처음 봤다.'
아무리 이렇게 저렇게 마음먹어도 당장 속에서부터 올라오는 그 메스꺼움을 어찌할 도리는 없었다.
'합격아, 해도 해도 너무 하는 거 아냐?'
오죽하면 그런 생각도 했다.
난 이렇게 힘들고 죽겠는데 사는 것도 아니게 살고 있는데 남편은 세상 걱정 없이 잘만 살고 있다는 사실에, 전혀 공시생처럼 살지 않는 생활에 조금은 화가 났다.
화낼 일은 아니지만.
그래, 내 입덧이 심할수록 합격이가 건강하다는 증거고, 그만큼 남편은 합격에 더 가까워지는 거야.
아무 연관성도 없는, 논리도 무엇도 없는 얼토당토않은 말로 나를 위로하면 견뎌냈다.
그가 당시 공시생 신분만 아니었더라도.
"자기야 자기가 대신 입덧 좀 하면 안 돼?"
"그게 무슨 소리야?"
"나 사랑한다며? 그러면 입덧 정도는 대신해줄 수 있잖아?"
말인지 막걸린지 아무 말이나 갖다 붙인다.
기원전 2,000년 경 전쯤에 남편에게서 들은 사랑한다는 소리 한마디 믿고 들이댄다.
나만 아니면 돼.
나만 그 입덧의 늪에서 빠져나오면 되는 거야.
남편이라면 그까짓 입덧쯤 다 감당해 낼 수 있을 거야.
인간적으로 그 정도는 해줘야지.
이거 가질래?
줄게, 공짜로.
그럴 일은 결코 없지만,
만약에 그가 나처럼 입덧을 심하게 하면,
"요란하게 입덧 좀 하지 마. 시끄러워서 잠을 잘 수가 없잖아. 할 거면 화장실 들어가서 문 닫고 조용히 좀 하든지!"
하고 복수해 주리라.
생각만으로도 조금 위안이 되는구나.
좋은 거 알았다.
"남들은 남편이 대신 입덧하기도 한다더라."
"그게 말이 돼?"
"진짜 그런 사람도 있다니까. 나 정말 미치겠어. 대신 좀 해 봐!"
진짜 내 모든 걸 남편에게 다 주고 싶었다.
오죽하면 입덧까지도.
이 입덧도 좀 가져가라고.
그러나 내가 간과하고 있는 사실이 있었다.
"남편이 입덧하는 거 말야, 그것도 다 부부 금실이 좋아야 그런다더라."
그 말 한마디에 나는 바로 단념했다.
내 팔자에 무슨 남편 입덧이냐.
금실이 좋아야 한다잖아. 이번 결혼 때는 절대 불가능한 일을 내가 꿈꾸었구나 감히.
꽝! 이것도 다음번 결혼 때.
남들은 임신을 하면 평소 안 먹던 것도 먹고 싶고 식욕이 왕성해지고 그런다던데 나는 미칠듯한 입덧 말고는 아무 증상이 없다.
'결혼하고 임신을 하게 되면 과연 어떤 주문을 하며 남편에게 대접이란 걸 한 번 받아볼까?
절대 절대 그 계절에 구할 수 없는 음식을 주문해야지,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 자고 있는 남편을 흔들어 깨워 심부름을 보내 보리라. 하루는 이게 먹고 싶다고 하고 하루는 저게 먹고 싶다고 해야지. 주문한 음식을 눈앞에 대령하면 기다렸다는 듯이 꼴도 보기 싫어졌다면서 당장 치우라고 요란법석을 떨어보리라. 내가 부릴 수 있는 변덕이 어디까지인지 그때 다 발휘해 보리라. 임신 기간에 여자가 누릴 수 있는 호사는 다 누려본다잖아 남들은. 그땐 남편도 어느 정도 눈감아 준다고 하니까. 그렇게 좋은 기회는 다시없어.'
결혼도 하기 전부터 나는 종종 그런 환상에 빠지곤 했다.
그러나, 현실은 가혹했다.
난 입덧만 미친 듯이 해댔고, 식욕이란 걸 잃었으며 냉장고 틈으로 나오는 반찬 냄새에도 화장실로 달려가야만 했다.
왜 난 먹고 싶은 게 없는 걸까, 남들은 평소엔 먹지도 않던 것들이 먹고 싶기도 하다고 그러는데. 나는 어디가 지금 고장 난 건 아닐까.
고작해야 순두부찌개가 다다.
떡볶이면 됐다.
아이고 우리 효자인지 효녀인지 참으로 기특하다.
아빠 심부름 갈 시간도 줄여서 공부에만 매진하라고 이렇게 협조해 주는 거야?
그런 거지?
엄마의 정신건강은 소중하잖니.
한때는 그런 생각도 했었다.
평소에 안 먹던 그런 음식이 자꾸 먹고 싶어지면 어쩐담?
보통은 음식을 좀 가려먹는 편이다.
내가 먹는 음식은 언제나 거기서 거기, 크게 틀을 벗어나지 않았다.
그래서 이번 임신을 계기로 내 입맛에 일대 혁명이 일어날지도 모르겠다는 기대를 은근하기도 했다.
나는 그 당시 점심 도시락을 준비해서 출근을 했고 남편도 도시락을 들고 도서관으로 공부하러 다녔다.
입덧 때문에라도 죽을 맛인데 두 사람 몫의 도시락까지 준비하는 일은 버거웠다.
반찬은 늘 변변찮았고 특별한 메뉴도 없었으며 그저 근근이 생명 연장만 하는 수준이었다고나 할까.
입덧도 입덧이지만 우선은 내가 입맛이 없으니 음식에 덜 신경을 쓰게 된 거다.
하루는 남편이 작정을 하고 나에게 말을 했다.
"자기야. 나 반찬이 너무 허술해. 창피해서 도시락을 못 열겠어. 옆에 사람들은 햄 반찬이라도 싸오는데 나는 맨날 반찬이 똑같아."
나 지금 당장 가정법원으로 달려가야 되는 거 맞지?
'증거자료 4'로 채택한다.
아내는 지독한 입덧에 제대로 된 음식 하나 못 먹고 토해대고 있는데 남편이란 사람이 할 소리는 아니지 솔직히.
내 도시락이나 네 도시락이나 겸손한 건 마찬가지라고.
정말 창피한 게 뭔지 모르는 사람이 분명하다.
"뭐라고? 지금 나보고 반찬 투정하는 거야 설마?"
"아니. 반찬에 신경 좀 써 달라고. 솔직히 너무 하잖아. 맨날 김치야."
"그럼 뚜껑 열기 창피하면 그대로 뚜껑 닫고 통째로 씹어 먹어 버려. 그럼 되겠네."
"지금 그게 무슨 말이야?"
아무도 남편의 반찬이 김치 쪼가리인지 랍스터인지 관심도 안 가질 게 분명한데.
"그것도 고마운 줄 알아야지. 지금 내 상태 안 보여? 배가 덜 고팠구먼? 나는 뭐 내 도시락에 금가루라도 뿌려서 가는 줄 알아?"
계속 그런 식으로 나오면 다른 가루를 뿌려 버리는 수가 있어.
매운맛 보고 싶지 않다면 그쯤에서 그만두는 게 좋을 거다.
나 태교해야 되는 몸이야.
적당히 하고 끝내.
태교에 협조는 못해줄 망정 화는 돋우지 말아야지.
남에게 부탁할 생각하지 말고 본인이 직접 나서면 될 것을.
공시생 신분이란 걸 감안하고, 내가 지금 임신 중이니 태교에 안 좋으므로 자식에게 못 볼 꼴 보이고 싶지 않으니 더 이상 대꾸는 안 한다.
그냥 다음날 계란말이로 원수를 은혜로 갚는다.
원수를 은혜로 갚으라는 말을 어디서 들은 게 있어서.
어디까지나 난 임신 중이니까.
그날 저녁 퇴근하고 돌아온 내게 남편은 호들갑을 떨며,
"자기야. 오늘 정말 자랑스럽게 도시락 뚜껑을 열었어. 정말 고마워. 역시 자기가 최고야!"
이렇게 단순할 수가.
그래. 사람이 나빠서 그런 게 아니지.
그냥 눈치가 아주 많이 심각하게 없을 뿐인 거다.
사람이 공부만 하고 사느라 어떻게 되어 버린 걸 거야.
공시생은 사람도 아닌데 내가 사람이라고 착각을 하고 있었네?
내가 선택한 사람이다.
누구 원망할 수도 없다.
내가 거두리라.
그런데 도대체 언제까지?
일단은 합격할 때까지...... 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