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하지) 않(은) 남매

초3 아들이 알파벳 시험에 대응하는 자세

그래도 나는 2023. 7. 7. 07: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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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맞다! 엄마, 오늘 알파벳 시험 본다고 했는데."
"그걸 벌써 얘기해?"
시곗바늘이 월요일 아침 8시 30분을 향해 가고 있었다.
초등 3학년인 아들은 대개 이런 식이시다.
주말 내내 실컷 놀고 월요일 아침에, 그렇게나 빨리 알림장을 확인하신다. 그것도 가방 메고 나가기 몇 초 전에.
나는 그 모습에 매일 놀란다.
한 번쯤 깜빡하고 그냥 넘어갈 수도 있을만하건만 하루도 빠짐없이, 비록 뒷북을 치는 수준이긴 하나 아침마다 알림장을 꼬박꼬박 확인해 주는 센스, 열 살의 어깨가 무겁다.
이왕 확인하는 거 전날에 집에 오자마자 확인하고 챙길 게 있으면 챙기고 숙제할 게 있으면 다 해버렸으면 좋겠는데, 어디까지나 내 마음뿐이다.
제때 알림장을 확인하지 않은 과보는 그 어린이가 마땅히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바이다.
그래서 아들이 하교하고 오면 내가 먼저 슬며시 알림장을 확인하고 아들이 행여라도 그에 관해 얘기를 꺼낼까 이제나 저제나 기다려 본다.
무슨 기밀 문서라도되는 듯 아들은 내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주말 내내 알림장 내용을 확인하지 않고 있다고 그날도 월요일 아침에서야 그것을 기어이 확인하셨다.
 
"우리 아들, 그럼 어떡하지? 주말 내내 실컷 놀았는데. 그런 시험이 있는 줄 알았으면 미리 공부라도 했어야 하지 않을까?(= 아무리 어리다기로소니 본인이 직접 쓴 알림장 내용도 기억을 못 하다니, 게다가 시험이라며, 도대체 어쩔 셈이냐?= 주말에 시간이 많았는데 그때 여유롭게 준비했으면 좋았을 것을 시험 당일날 아침에 그것도 지금 당장 학교로 가도 모자랄 판에 넌 대체 어쩌자고 벌써 그 사실을 엄마에게 알려준 거지?)"
나만 살짝 걱정이 되었다.
"에이, 괜찮아 엄마. 지금 하면 돼."
아들은 무사태평했다.
"그래도 이제 학교 가야 할 시간인데 가능할까? 근데 너 알파벳은 다 알아?"
"아니, 모르지."
이 어린이의 위풍당당함 앞에 내가 다 기가 눌린다.
"시간이 없을 것 같은데 어떡하지?"
"엄마. 지금부터라도 하면 되지. 안 하는 것보다야 낫잖아."
"그래. 그렇긴 한데."
"엄마가 알려 주면 되잖아, 얼른 알려 줘."
그 많은 알파벳을 다 알지는 못하고 아들은 b와 d를 헷갈려하는 것을 시작으로 아직 정복하지 못한 몇 개의 알파벳 앞에서 최선을 다했다.
"엄마가 알려줄게. 이렇게 생각해 봐. 디는 말이야. 디귿을 먼저 쓰고 그 옆에 세로로 1자로 붙여 써봐 그러면 '디'한글이랑 생긴 것도 비슷하잖아. 이렇게 b 하고 d를 구별해 봐. 어때?"
"우와. 엄마 그렇게 생각하니까 안 헷갈려."
"자, e가 잘 생각 안 난다고 했지? 유명한 마트를 생각해. g는 너 좋아하는 과자 있지? 거기에 무게가 쓰여 있잖아, 항상 숫자 옆에 그게 붙어 있지? 그램이라고 읽는 건데 그게 g야. 또 헷갈리는 게 뭐야?"
나는 나이롱 족집게 과외 선생님이 되었다.
"엄마가 알려준 대로 하니까 진짜 쉽네. 이제 다 알겠어."
"그래? 그럼 얼른 받아 적어 볼래? 엄마가 불러 줄 테니까."
절대 극성엄마는 아닌 나는, 아들이 하나라도 틀릴까 봐 벌벌 떠는 그런 엄마는 아닌 나는, 알파벳 그거  남의 나라 문자 그런 거 아직은 다 몰라도 된다고 말하는 나는, 나는, 나는, 한낱 알파벳 시험에 목매다는 그런 성적지상주의 엄마가 절대 아니다.(고 강력히 주장하는 바이다.)
 
"엄마! 나 오늘 영어 시험 10점 받았어!"
어?
아니, 럴수 럴수 이럴 수가!!!
어디서 하늘 무너지는 소리 들렸으랴!
최대한 침착해야 해.
절대 실망감이 얼굴 표정에 드러나선 안돼.
위로해 줘야지.
괜찮다 괜찮아. 그럴 수도 있지 뭐.
엄마는 중학교 가서 겨우 알파벳을 뗐는걸.
하지만 뭐라고 위로의 말을 해줘야 할까?
"아, 그래. 우리 아들이 오늘 시험이 어려웠나 보네? 괜찮아. 10 점도 어디야? 하나도 안 맞을 수 있었는데 그래도 10점이나 맞았다는 게 어디야. 잘~ 했어!"
잠시 후 그 어린이는 의기양양하게 시험지를 내밀었다.
"자, 보고 사인해 줘요. 하나에 1점씩, 10 문제 다 맞아서 10점이야. 속았지?!"
장~하다 내 아들.
모로 가긴 했지만 서울을 기어코 가긴 갔구나.
"근데 오늘 솔직히 우리가 한 건 벼락치기란 거야. 이렇게 급히 당장 시험에 급급해서 바짝 공부하는 걸 벼락치기라고 하거든. 이렇게 공부한 건 머릿속에 잘 안 남아. 순간이야. 다음부터는 미리 좀 준비하는 것도 좋을 것 같아. 넌 어떻게 생각해?"
왕년에 벼락치기 좀 해 본 솜씨를 마음껏 뽐낸 나는 아들에게 나의 과거는 감쪽같이 숨기면서 벼락치기의 폐해에 대해 일장연설을 했다.
"엄마, 이 방법도 괜찮은데? 금방 보고 금방 시험 보니까 생각도 잘 나!"
어라? 내가 의도한 건 이런 게 아닌데?
일종의 최신 효과 뭐 이런 건가?
씁쓸해하면서 뿌듯해하면서 어이없어하면서, 어느새 나는 10점짜리 시험지에 자랑스레 사인을 하고 있었다.